 

하동 100년 미래 완성할 핵심프로젝트 추진 총력 윤상기 군수 신년사…50만 내외 군민과 호흡하며 하동의 미래 브랜드 가치 향상
2019년 기해년 새해를 맞아 650여 하동군청 공무원들이 알프스 하동의 100년 미래 완성을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동군은 2일 오전 8시 30분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윤상기 군수를 비롯한 500여 공무원이 참석한 가운데 2019년 시무식을 갖고 새해 첫 업무를 시작했다.
시무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유공자 표창, 새해 축하 시루떡 자르기, 친절콘테스트 수상자 발표, 2018년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새해 군정 주요업무를 공유하는 영상물 시청, 신년사 대독, 군수 신년 인사말, 영화관람 순으로 진행됐다.
윤상기 군수는 기획예산담당관실 강은란 주무관이 대독한 신년사를 통해 ‘행복한 군민 튼튼한 하동’을 실현하고자 열정과 노력을 다한 공직자의 노고를 격려하고 새해 하동 100년 미래를 완성할 핵심프로젝트 추진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차게 출발하자고 밝혔다.
윤 군수는 “돌이켜보면 지난해 지역내총생산(GRDP) 도내 1위 및 전국 20위, 하동재첩 국가중요어업유산 등재, 2019년 정부 경제정책방향에 1500억원의 알프스프로젝트 포함, 기업하기 좋은 환경 우수지역 평가 도내 1위 및 전국 5위 등 각 분야에서 이룬 긍정의 신호들은 4년 6개월간 이끌어 온 알프스 군정의 성과라고 자부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한 눈에 띄는 성과들은 각자 삶의 터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50만 내·외 군민과 하동군과 인연을 맺은 세계 각국의 숨은 조력자들, 그리고 100년 미래를 준비하는 공직자의 열정에 힘입은 것”이라고 말했다.
윤 군수는 “이러한 성과를 디딤돌로 새해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경제·여행·라이프·금융·투자 등 급변하는 세계의 트렌드를 발맞춰 버릴 것을 과감히 버리고 핵심 군정의 슈퍼 사이클이자 가장 강력한 경제 원동력인 수출, 투자, 관광 유치에 온힘을 쏟자”고 주문했다.
그는 “일찍이 2019년을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 투자유치 총력추진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발 빠른 준비에 착수한데 이어 하동의 브랜드 가치, 진품의 가치를 더욱 높여 나가기 위해 더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중점 타깃을 설정해 영역을 최대한 넓혀 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명품브랜드가 도전정신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것처럼 이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재첩잡이의 세계 최초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복합교통타운 조성, 공동주택1000호 건립, 야생차의 세계유산엑스포 추진, 차인박물관 건립, 어촌뉴딜 300사업 등 올해 중점적으로 추진할 핵심 프로젝트에 총력을 기울여 100년 미래를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윤 군수는 “새해 핵심 프로젝트 달성은 군수 혼자만이 아닌 모든 군민의 힘에 달려있는 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100년 미래를 꿈꾸며 군민과 함께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윤상기 군수와 간부공무원들은 이날 시무식에 앞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갈마산 충혼탑을 참배했다.
[지리산고향뉴스] www.jsgh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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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서 제2의 3·1운동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 서훈 신청 하동군·경남독립운동연구소, 1927년 제2의 3·1운동 주도 46명 수형기록 발굴 강대용·여국엽 선생과 3남매·한집안 세 식구·호남출신 등 독립운동가 문건 공개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27년 하동에서 제2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의 수형기록을 3·1운동 100년 만에 찾아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다고 2일 밝혔다.
여기에는 제2의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강대용(姜大榕·하동군 악양면)·여국엽(余國燁·악양면)·여태원(余太元·악양면) 선생 등 13명과 3남매 독립운동가 조복애(趙福愛·옥종면), 대를 이은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박성무(朴性茂·적량면), 옥중 순국한 정석용·이형석·이기호 선생, 호남출신 최백근(광양시)·김용상(정읍시)이 포함됐다.
이번 독립운동가 발굴은 지난해 3월 윤상기 군수와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군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2년간 추진키로 함에 따라 지난해 1차 발굴자 25명의 서훈신청에 이어 이번에 2차 발굴자 46명의 서훈신청이 이뤄졌다.
정재상 소장은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형사공소사건부’·‘집행원부’·‘일제감시카드’·‘경남도 보고서’ 등의 자료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27년 하동에서의 제2의 3·1독립운동을 주동한 13명의 수형기록과 여성독립운동가 조복애 선생을 포함,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등 46명의 항일행적이 담긴 수형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 1927년 하동서 제2의 3·1운동 거사 = 이번에 발굴한 문건 중에 1927년 하동에서 제2의 3·1운동이 일어났음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악양면 출신 강대용·여국엽·임성필·여태원·송우복 선생 등 20여명이 1926년 12월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 선생의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규탄하는 시위를 모의했다.
강대용(당시 41세)·여국엽(36세) 선생은 1927년 하동·광양지역 등 뜻있는 인사 100여명에게 비밀리에 연락, 하동장날을 기해 대규모 일제 규탄 시위를 하기로 했다.
선생은 같은 면 중대마을 임성필(47)·노종현(30)·이시용(30)·여성원(27)·여태원(24)을 규탄시위 총 연락책으로, 정동마을 송우복(42)·조한식(39), 동매마을 김수룡(29)·강상용(23) 등을 중심으로 빈틈없는 거사 준비를 진행했다.
또 선생은 하동·적량·고전 지역은, 하동읍 두곡리 거주 김삼륜(32)을 총책으로 했다. 그리고 인근 전남 광양지역은 진상면 섬거 출신으로 악양면 정서에 거주한 김무일(22)을 연락책으로 했다. 거사일은 하동장날인 3월 3일로 정했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지역인사는 광양군의 골약면·다압면·진월면·진상면의 김태수(30)·최한원(23)·최영근(22)을 포함, 300여명에 달했다. 시위는 인근 주민과 상인 장꾼 500여명도 가세했다. 시위대는 점차 늘어나 1000여명에 달했다.
강대용·여국엽 선생은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하동경찰서와 군청을 향해 거친 행진을 하면서 “조선민족 억압하는 모든 법령을 철폐하라, 일본인의 조선이민을 반대한다, 경작권 확립을 보장하라, 부당한 납세를 반대한다, 모든 학교 교육은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제를 규탄했다.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다급해진 일본경찰은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일본경찰과 충돌, 진압 경찰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같은 일로 강대용·여국엽·여태원·임성필·송우복 선생 등 중심인물 50여명이 일본경찰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30여명이 재판에 넘겨져 주동자 강대용·여국엽 선생 등 13명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騷擾)·상해(傷害) 등의 죄목으로 형이 확정될 때까지 징역 2년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 3남매가 독립운동에 가담 = 3남매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조복애(趙福愛·1918~?·女·옥종면) 선생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조정래(건국훈장)의 여동생이며 독립운동가 조옥래의 누나이다.
선생은 1942년 숙명여자전문학교(지금의 숙명여자대학교) 재학 중 일제의 한반도 침탈정책을 비판하며 조국독립에 앞장섰다. 이같은 일로 1942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동생 조옥래(趙玉來·1922~?) 선생은 1941년 일본으로 유학해 박응포·신기중 등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해 조선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로 인해 1942년 2월 일본에서 검거돼 1943년 4월 일본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을 때까지 1년여 간 옥고를 치렀다.
◇ 한집안 세 식구와 호남출신 독립운동가의 활약 =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가담한 박성무 선생은 하동지역 3·1만세운동 지도자 박치화(건국훈장)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 박문화(대통령 표창)의 조카이다. 한집안 세 식구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1931년 3월 진주공립고등학교 4학년 재학 중 수업료 철폐를 위한 동맹휴교를 선동한 혐의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고향 하동으로 돌아와 하동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에서 간부로 활동 중이던 신만중(건국훈장‧적량면) 선생을 만나면서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투신했다.
하지만 하동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박성무 선생은 1933년 4월 그의 숙부 박문화가 살고 있던 전북 정읍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정읍공립농업학교 학생 최종엽(임실)·최봉한(군산)·김민옥(정읍)·최대열(부안)·이병국(창원)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1933년 5월 위 동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돼 1934년 9월 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받을 때까지 4개월 여간 옥고를 치렀다.
◇ 옥중 순국한 정석용·이형석·이기호 선생 = 하동군 고전면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정석용(고전면)·이향석(고전면)·이기호(양보면) 선생은 1919년 4월 고전면 주교(배다리) 만세운동에 가담한 인물이다.
세 선생은 고전면 출신 박영묵·이종인·정상정·정재기 등 33인과 일신단을 조직하고 4월 6일 주교리 장터에서 1000여 명의 장꾼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같은 일로 세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모두 순국했다. 이같은 사실은 1952년 경남도가 작성해 내무부에 올린 ‘3·1독립운동 당시 일본인으로부터 피살당한 애국자 명부’에서 확인됐다.
한편, 여국엽 선생의 항일기록 발굴 소식을 접한 선생의 조카 여상규 국회의원(법제사법위원장, 사천‧남해‧하동)은 “숙부님이 투옥돼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부친으로부터 전해 들었으나 그동안 제대로 챙겨보지 못한 죄스러움과 민족애에 대한 존경심에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친은 숙부님의 옥바라지를 위해 진주형무소까지 수차례 다녔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집안 어른들은 일제의 감시대상으로 많은 고통이 있었다”고 말했다.
여 의원은 “그동안 독립운동가 발굴사업에 힘써온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면서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국가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윤상기 군수는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의 행적이 긴 어둠을 털고 세상의 빛과 보게 돼 뜻깊다”며 “늦었지만 선열들의 큰 발자취를 통해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분들의 숭고한 뜻이 후세에 길이 전해져 부강한 국가로 나아가는데 초석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문건을 분석한 정재상 소장은 “1927년 하동에서 1000여명이 가담한 제2의 3·1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났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며 “이는 영호남지역에서 1919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로 평가된다. 이때 50여명이 연행돼 30여명이 재판에 넘겨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러한 내용들이 지역향토사에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어 안타깝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잊힌 항일영웅들에 대한 예우에 우리 사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사진
 1. 강대용 선생
 2. 여국엽 선생
 3. 여태원 선생
 4. 조복애 선생(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 1942년, 일제감시 인물카드)

 5·6. 대구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형사공소사건부’(1927년, 강대용·임성필·여국엽 선생 등 13명과 관련한 인적사항 및 형량이 적시돼 있다.)
 7. 박성무 선생 등 판결문(1934년, 전주지방법원)
 8. 이형석·정석용·이기호 선생 관련 경상남도 보고서(1952년, 3·1운동 당시 순국한 피살자 명부)
 9. 윤상기 군수와 정재상 소장이 서훈신청에 앞서 공적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10. 정재상 소장
◇ 서훈신청자 인적사항 및 공적요지 ▲강대용(姜大榕‧1886~1958‧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413) 소요 등의 죄목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미결구류 통산 240일의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명순(姜明順‧1904~?‧하동군 하동면 읍내동) 선생은 1928년 경남 통영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요 및 건조물 손괴 등의 죄목으로 마산법원에서 징역 3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상용(姜相用‧1904~?‧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권대섭(權大燮‧1896~1982‧하동군 청암면 궁항리) 선생은 1919년 청암면 궁항리에서 정남시 등과 인근 주민 300여명을 규합하여 하동군 옥종면 안계 장터로 진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금궁병기(金宮炳基‧1920~?‧하동군 적량면 관리 557) 선생은 1944년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선전물을 제작 배포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및 언론 출판‧집회‧결사 등 임시 취체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무일(金武一‧1905~?‧본적/광양군 진상면 섬거리 /주소/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삼륜(金三倫‧1895~?‧하동군 하동면 두곡리) 강대용과 활동사항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수룡(金水龍‧1903~?‧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승탁(金承鐸‧1899~?‧본적/ 하동군 적량면 서리/주소/하동군 횡천면 여동리) 선생은 1920년 하동에서 신기중 선생 등과 함께 일제의 한반도 강탈 정책을 비판하는 활동을 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대정8년 제령7호 위반의 죄목으로 1920년 12월 2일 진주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항고했다. 하지만 항고 기각으로 옥고를 치렀다. ▲김완돈(金完惇‧1904~?‧본적/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주소/구례군 간문면 운천리) 선생은 1935년 영‧호남 일대에서 일제의 강탈정책을 규탄하는 시위와 독립운동가를 숨겨준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과 범인장닉 등의 죄목으로 1935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미결 통산 581일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주석(金周錫‧1896~?‧승려‧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승려 김주석 선생은 1919년 4월 6일 정상근 양봉원 등 300여명과 함께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3‧1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승려 김주석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진주 감옥에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태수(金泰守‧1898~?‧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주소/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선생은 1927년 최한원 최영근 등과 함께 조선어로 된 문서에 일제의 불법 감금 폐지와 조선어 사용 확립 등의 내용을 담은 문서를 광양군 일대에 배포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김태순(金兌淳‧1904~?‧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708) 선생은 1928년 조선청년동맹원으로 출판‧집회‧결사 자유의 건 등 일본의 강탈정책을 비방하고 선전물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4개월 형을 받았다. 선생은 또다시 1935년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서다 일제에 체포돼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경봉(南景峰‧1880~?‧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선생은 1920년 경남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대정8년 제령7호 위반의 죄목으로 1921년 1월 8일 마산 충무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노종현(盧宗鉉‧1897~?‧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박만홍(朴晩鴻‧1890~?‧하동군 양보면) 선생은 1920년 충청도 공주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보안법 위반‧출판법 위반 ‧ 대정8년 제령7호 위반 ‧ 정치처벌법 위반으로 대전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성무(朴性茂‧1908~?‧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938) 본문 기사 참조 ▲송우복(宋又福‧1885~?‧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강대용과 활동사항 같음. 형이 확정될 때 까지 1년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신기중(愼驥重‧1901~?‧하동군 적량면 고절리) 김승탁과 내용 같음. ▲양봉원(梁奉源‧1900‧?‧승려‧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쌍계사 승가대학 학생) 쌍계사 승가대학 학생으로 김주석과 내용 같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여국엽(余國燁‧1892~1978‧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59)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여성원(余成元‧泰玉‧1899~?‧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여태원(余太元‧ 宗守‧1903~1966‧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747)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1년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오재원(吳在元‧1889~?‧본적/경주군 산내면 내칠리/주소/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선생은 1939년 경남 부산 경북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민족해방운동을 펼쳤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부산법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선생은 1942년 또 다시 항일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징역 2년 미결구류 통산 150일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윤경삼(尹京三‧1882~?‧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 주소/광주군 송정면 송정리) 선생은 1926년 전남 ‧ 경남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광주법원에서 소위 소요 상해 등의 죄목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았다. ▲이기호(李琦鎬‧1888~1919‧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선생은 1919년 4월 6일 박영목 이종인 정상정 등과 독립운동 단체인 일신단 조직을 주도하고 고전면 주교(배다리)장터에서 1천여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이시용(李時用‧1897~1958‧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618) 강대용과 활동사항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용두(李容杜‧1905~?‧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580) 선생은 1927년 하동농업보습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2학년 때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928년 하동에서 일제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만화와 한글을 사용해 야학회장 벽면에 첨부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1929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이원태(李源泰‧1894~?‧하동군 남면 덕천) 선생은 1919년 3월 29일 진교 장날을 이용해 정재백 이홍식 등 1000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5월 12일 진주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형석(李享石‧亨石‧1880~?‧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이기호와 내용 같음. ▲임성필(林聖必‧ 聖範‧1880~?‧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정석용(鄭錫鎔‧1878~1919‧하동군 고전면 범아리) 이기호와 내용 같음. ▲정희근(鄭禧根‧1888~?‧하동군 금양면 대치리 139) 선생은 1919년 박치화(건국훈장) 등과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하동 독립선언서를 제작 서명한 12인 중 한명이다. 선생은 3월 20일 남해장터에서 이범호 등과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태 90도 형을 받았으나 항고하여 2개월 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생을 마쳤다. ▲조복애(趙福愛‧1918~?‧女‧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77) 본문 기사 내용과 같음 ▲조옥래(趙玉來1922~?‧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77) 본문 기사 내용과 같음. ▲조용환(조鎔煥‧1909~?‧하동군 적량면 동리 965) 선생은 1937년 전남‧경남 일대에서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비판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광주법원에서 소위 국가보안법 위반 ‧ 특별 조치령 위반으로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한식(趙漢植‧1889~1963‧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828) 강대용과 내용 같음. 형이 확정 될 때 까지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최백근(崔百根‧1913~?‧본적/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주소/하동군 하동면 읍내동) 선생은 1931년 일제의 조선 침탈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하동군내에 배포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진주법원에서 금고 6개월 형을 받았다. ▲최영근(崔永根‧1906~?‧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 /주소/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김태수와 내용 같음. ▲최한원(崔漢元‧1905~?‧본적/하동군 하동면 읍내리 /주소/광양군 골약면 태인리) 김태수와 내용 같음.
◇ 박성무와 함께 호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하동출신 박성무 선생과 함께 활동한 ▲이병국(李柄國‧1911~?‧경남 창원군 웅동면 마천리 94) 선생은 1933년 4월 중순 전북 정읍공립농업학교 3학년 재학 중 박성무의 지도를 받으며 최봉한(대통령 표창) 최대열 김민옥 최종엽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고 적색노동조합에 적극 참여하는 등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로 1934년 5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9월 중순 전주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을 때 까지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최대열(崔大烈‧1913~?‧전북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 568) ▲김민옥(金玟玉‧1912~?‧전북 정읍군 덕천면 달천리 596). ▲최종엽(崔宗燁‧1910~?‧전북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90)은 각각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을 때 까지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용상(金容相‧1914~?‧전북 정읍군 정주읍 시기리 306) 선생은 정읍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1932년 김한섭 등과 정읍에서 비밀결사 노동조합을 조직,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로 1934년 5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9월 중순 전주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받을 때 까지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한섭(金漢燮‧1913~?‧전북 정읍군 정주읍 연지리 208) 김상용과 활동사항 같음.(이상 46명)
참고
독립유공자 유족 연락처 1. 여국엽 선생 후손 - 여상규(관계: 조카) (직업: 국회의원, 법제사법위원장, 사천‧남해‧하동) (연락처: 국회사무실: 02-784-1845 위원장실: 02-784-1354 휴대폰: 010-5201-0593 2. 강대용 선생 후손 - 강동제(관계: 손자) (직업: 前 농림부 국장) (연락처: 서울 용산구 전화 010-8770-8598) - 강인철(관계: 증손자) (직업: 前 검사) 사법연수원 18기 법무부, 재경부 천안지청장 순천지청장 現 변호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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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경상대, 대학·지역사회 발전 맞손 하동군, 관·학협력 활성화 MOU…연구개발 지원·지식재산권 활용 지역발전 노력
하동군과 경상대학교는 지난달 31일 경상대 본부 상황실에서 대학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관·학 협력 활성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2일 밝혔다.
이날 협약식은 윤상기 군수를 비롯한 군청 관계자와 이상경 총장 등 경상대 대학본부 보직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협약서 주요 내용 소개, 협약 체결, 이상경 총장과 윤상기 군수 인사말,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됐다.
양 기관은 이날 협약식에서 관·학 협력 활성화를 통해 대학 및 지역의 상생발전의 긴요함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기술의 연구개발 지원과 지식재산권을 활용한 지역 발전 및 인프라 구축 실현을 위해 상호 노력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양 기관은 △기술의 연구·개발 및 지식재산권의 창출·보호·활용 △기술사업화 네트워크 구축 △신사업 조성을 위한 실증지원 및 연구개발사업 지원 △지역의 인재육성과 산·학·관 공동연구 기반 조성에 힘쓰기로 했다.
또한 △지역 내 산업체 육성·지원 위한 인프라 구축 △지역 대학생들의 관련 산업 전문성 확대와 고용 및 일자리 창출 △산업 클러스터 구축 및 지역기업 육성·지원을 위한 정책개발 협력 △귀농(귀촌) 인력 유입 및 정착 지원 등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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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정보공사 하동지사, 15년째 후학사랑‘화제’ 하동군장학재단, 2004년부터 전 직원 매월 1만원 이상 자동이체 등 1900만원 기탁
한국국토정보공사 하동지사(지사장 김영민)가 2004년 100만원을 시작으로 그해 말부터 전 직원이 매월 1만원 이상 15년째 후학사랑 자동이체에 참여해 화제가 되고 있다.
하동군장학재단(이사장 이양호)은 국토정보공사 하동지사 전 직원이 봉급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아 지금까지 15년간 장학재단에 기탁한 장학기금이 1900만원에 이른다고 2일 밝혔다.
이와 별도로 이경수 수석팀장은 2015년부터 매년 100만원씩 지금까지 총 500만원의 장학기금을 출연하며 후학사랑에 힘을 보태고 있다.
초·중·고등학교를 줄곧 하동에서 다닌 토박이 김영민 지사장의 후학사랑도 남다르다. 김 지사장은 개인적으로 2013년 100만원을 기탁한데 이어 2014년부터 매월 10만원씩 후학사랑 자동이체에 동참해 지금까지 520만원을 기부했다.
김영민 지사장은 “다른 지역 출신이 있음에도 끊임없이 하동지역 후학사랑에 동참해 준 직원들에게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지역후배 사랑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이양호 이사장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15년째 이어온 장학기금 출연에 감사드린다”며 “기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여러분의 숭고한 뜻을 잘 헤아려 미래 인재육성에 소중히 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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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전 26승, 나를 찾는 진로탐구대회 하동 노량초, 꿈·끼 탐색주간 전교생 대상 삶의 목표 세우고 진로의식 형성
하동 노량초등학교(교장 제용구)는 지난달 12∼24일 꿈·끼 탐색 주간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나를 찾는 진로탐구대회’를 실시했다고 2일 밝혔다.
이번 대회는 학생들에게 자기 삶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진로의식을 형성해 자긍심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학년별 대회로 진행됐다.
먼저 자신의 특성을 이해하는 활동을 통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대회 종목과 규칙을 스스로 정하고 학년별 대회를 가졌다.
학생들이 정한 대회 종목은 적극적 경청 대회, 암기력 대회, 수학문제 빨리풀기, 체스, 유연성, 컴퓨터 타자왕, 달리기 시합, 바른 글씨쓰기, 그림 그리기, 무기 정보왕, 레고왕, 댄스왕, 연극왕 등 26개로 이뤄졌다.
대회에 참여한 한 학생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내가 잘하는 대회에 참여해 상도 받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대회를 추진한 담당자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 사람의 1등이 아닌 모두가 1등이 돼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대회가 됐다”고 말했다.
노량초등학교는 앞으로 학생들의 진로 의식을 형성하고 자긍심 함양 기회를 제공하고자 진로탐구대회를 지속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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