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회) 백선엽장군이 말하는 남부군 45사단장 황의지,
황의지라고 하면 남원의 대부분의 나이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황의지가 빨치산 대장 또는 빨치산 부대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생포되어 전향해서 평범한 남원사람( 김지회가 사살된 반선마을에서 살았음) 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남원사람들이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도 그와 함께 마닐라를 4박 5일 동안 다녀왔지만 그가 빨치산이라는 사실은 그 뒤 한참 후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가 북한출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썼다는 빨치산수기의 행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수기를 접할 수는 없었다. 최근에 박찬규 작가가 그의 수기를 정리한 평전을 읽고 그가 보통의 빨치산이 아니라 남부군 휘하 45사단장으로 명성을 떹쳤던 유명한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래에 쓴 백선엽장군의 <실록 지리산>에서도 그가 얼마나 유명했던 빨치산 사단장이었는가를 엿 볼 수 있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이 십 수 년 전에, 남원 뱀사골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에서 전사한 영령을 모신 군경충혼탑을 방문하면서 말로만 듣던 남부군 45사단장 황의지씨를 극적으로 만나고 그와 함께 대화했던 내용을 쓴 기록<지리산실록>을 소개한다.
-다음은 백선엽장군이 황의지에 관하여 쓴 수기(지리산실록)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지리산 뱀사골.
반선 주차장에서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쪽에 현대식 2층 상가 건물이 일자로 서 있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전적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지리산에서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 벌어졌던 또 하나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것이라고는 이 기념관이 유일하다.
지난해 나는 이곳에 들려 새로운 감회를 맛보았다. 전시실 유리상자 안에는 각종 귀순 권고 전단, 공비들의 장비 책자 등이 전시 돼 있었고 벽에는 백 야전사 백 일 토벌작전의 단계별 작전 요도가 낯 있는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지난 79년 건립된 이 기념관이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이곳에 자리한 것도 우연이 아닌 듯했다. 반선은 바로 김지회와 홍순석이 사살된 곳이었고 뱀사골은 오랫동안 빨치산들의 주요 아지트가 됐던 곳이었다. 전적기념관 밖에는 고 이승만 대통령의 「충혼」이란 휘호가 새겨진 충혼각이 서 있고 한켠에는 나와 최치환씨의 공적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55년 5월30일 서남지구 전투경찰 사령부가 토벌작전중 숨진 군경 6천3백33 위의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남원의 광한루원에 세웠던 이 충혼각은 87년 6월6일 이곳으로 이전됐다.우연히 순시 차 청주에 들렀다 급보를 전해 받았던 제주 4.3사건. 밤잠을 거르면서 진압 작전을 구상했던 여수 14연대 반란, 김지회의 구례 습격, 5단장으로 공비 토벌을 진두 지휘하던 시절, 백 야전사의 작전, 참모총장 시절 박 전투사령부의 끝내기 토벌작전등 내가 직.간접으로 맺었던 빨치산과의 악연이 눈앞을 스쳤다.
그것은 승리한 자의 감개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직 간접으로 빨치산 토벌에 관계한 오랜 기간 동안 내가 특별히 잘못을 저질러 자책하는 심정이 든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싸움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되도록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었다.내 가슴 한켠 에서 문득 피어났던 어두움은 피할 수도 있었을 동족간의 대결 속에서 그토록 많은 생명이 사라져 간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슬픔에 가까웠다. 왜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가. 주전선 뒤편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전쟁에서 양쪽으로 죽어간 그 숱한 죽음만큼 이념이란 소중했던 것인가.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분출됐던 그 극단적인 증오를 다스릴순 없었던 것인가. 나는 이같은 물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남원 반선마을 을 떠나기 전 나는 생존의 유일한 구빨치산 출신인 황의지(黃義智)씨를 만나 파란만장했던 그의 경력을 들을 수 있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무인다운 눈빛과 체격을 갖고 있었다.
전북 빨치산 주요 지휘자의 하나였던 그는 그로서는 악몽 같았을 백 야전사 작전의 주인공인 나를 만나고는 어색한 표정이었으나 둘 다 노년기에 접어든 세월 덕분인지 이내 속얘기를 털어 놓았다.
순창 태생인 그는 44년 징병1기로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됐던 인물이었다.
「징병 소집 통고를 받고 나는 바로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나 때문에 공출 압박을 심하게 받고 일본놈 순사들로부터 갖은 시달림을 받을 부모님 생각에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힘으로야 쬐그만 일본놈 순사 한두 명을 때려 뉘이기는 일도 아니었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중국 전선에 투입돼 남경에까지 갔다가 독일 패망 후 만주로 이동해 관동군에 합류했다.일본군은 조선인에 대해 항상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옷을 차려입고는 갈 수 없도록 했다. 나는 탈출을 기도하다가 문 밖을 나서는 순간에 되잡혔다.
8.15해방은 나와는 무관했다. 9월 15일, 관동군 무장 해제 시 함께 무장 해제당한 나는 곧바로 소련으로 끌려갔다. 하바로프스크에서 18일 동안을 더 들어가 쿠즈바스 탄전 지대에 이르렀다. 거기서 꼬박 4년 동안 나는 광부로 지냈다. 비록 포로의 몸이었지만 혹독한 식민지 생활을 겪었던 나는 처음 대하는 소련의 모습에 크게 감명 받았다. 간수들은 자주 욕지거리를 하기는 했으나 한번도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다. 일본 순사들이나 헌병들에게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나중에 내가 본명을 버리고 황학소(黃學蘇)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바로 소련에서 배우자는 뜻이었다.
48년 말, 포로 송환선을 타고 상륙한 곳이 흥남이었다. 흥남여중에서 동포들의 환영과 함께 정치 사상 교육을 받았다. 북한 당국은 북한 땅에 남아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한시바삐 해방된 고향에 가고 싶었다.
38선을 넘은 나는 곧 서북청년단에 붙잡혀 파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우리 일행 57명은 파주경찰서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것은 귀향의 꿈에 젖어 있던 내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물 고문과 고춧가루 고문, 몽둥이 찜질을 당하며 나는 비통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간신히 풀려나 집에 돌아온 뒤에도 실망과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시 신생 대한민국의 요직은 대부분 친일파 나부랭이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일본놈들에 붙어 순사 일을 하던 똑같은 얼굴들이 여전히 경찰에 몸담고 있었고, 그들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49년 6월 나는 남로당 전북 도당 사령부가 있다는 회문산을 향해 집을 나왔다. 처음 나는 평유격대원이었으나 군대 경력을 인정받아 진급했고, 잇단 유격전에서 승리로 곧 전북 도당의 대표적인 지휘자가 됐다. 나는 탱크 병단의 병단장을 지냈고, 전북 유격대에 독립418연대가 창설되면서 그 연대장을 맡았다. 나중에 418연대가 해체돼 항미연대와 구국연대가 만들어졌는데 항미연대는 박판쇠가, 구국연대는 내가 지휘했다.
남부군 체제 하에서 구국연대는 45사단으로, 항미연대는 46사단으로 개편됐다. 같은 부대가 이처럼 여러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세력 과시를 위한 유격전술의 일환이었다. 백 야전사 작전을 고비로 막강했던 우리 부대는 도둑놈 신세로 전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토벌부대가 겁나지 않았다. 비행기만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었다. 방준표가 정예 병역을 모두 빼가고 환자와 노약자만을 내게 남겨 주었을 때도 그리 낙담하지 않았다.그러다가 53년 4월 들어 완전히 깨졌다. 나는 매설된 수류탄을 잘못 밟아 파편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생포됐다.
그후 그는 남원경찰서에 사찰 유격대의 일원으로 「동지들의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활동했으며 지리산에 평화가 찾아온 다음부터는 뱀사골 입구에 자리를 잡고 등산객의 길안내를 해주는 일을 했다.내가 만났을 당시 그는 양발로 붕대로 감고 있었다.
80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노구로 견디기 힘든 고초를 겪었다면서 5공 정권에 이를 갈았다. 그러면서「진짜 원수는 일본놈들과 그 밑에서 붙어먹던 친일 주구들이다. 아직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는 친일 주구들을 척결해야만 이 민족의 한이 풀릴 것」이라고 강조 했다. 자신의 일생을 결정지은 주요 고비에서 매번 일제와 그 앞잡이들로부터 침해를 받았고, 그것이 입산의 동기가 됐던 그로서는 당연한 말일 것이다. 또한 비슷한 처지에서 입산해 빨치산이 됐던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백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