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당쟁과 채색지도
남원학연구소장
노 상 준
선거 때 정치 판도를 보면 임진 정유재란때 왜군이 사용한 채색지도와 조선시대 4색 당쟁이 연상된다. 정치권이 국토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놓은 것일까 지방선거에서도 여·야 지역별로 나누어지며 서로 반목하고 총선거때는 지역별 득표분포를 청·황·등·녹의 당색으로 그려놓은 지도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임진 정유년 때의 조선의 지도라도 보는 것만 같다. 지역감정이 정치색으로 부각되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대마도 “도주” 종의지(宗義智)가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고 왜군이 사용할 작전지도를 그렸는데 조선8도가 각기 다른 채색으로 칠해져 공격의 경중을 분류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하던 포루투칼 선교사인 “프로이스”의 「임진왜란 견문기」에도 그와 같은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적색은 전라도 ◦황색은 강원도와 평안도 ◦청색은 경기도와 충청도 ◦녹색은 황해도 ◦흑색은 함경도 ◦색깔이 없는 백색은 경상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왜군은 전라도를 적국(赤國)으로 충청도와 경기도를 청국(靑國)이라 불렀다. 풍신수길은 정유년 재침을 명령하면서 공격목표를 적국 전라도로 삼고 우선 전라도에 진격하여 전라도 사람들을 일시에 남김없이 모조리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충청도 경기도와 그 외의 도에서는 알아서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풍신수길 高麗再出陳法度 제17항 일본대판성 천수각 소장) 전라도가 적색인 것은 공격목표 제1순위임을 상징한다. 임진왜란의 패인을 전라도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때문이였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은 처절하였다. 왜군 5만6천명에 대항하여 남원성을 지키던 명나라원군 3천명과 조선군 1천명, 성내주민 등 1만여명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고, 남원성은 무너지고, 왜군은 많은 도공과 포로를 끌어가고 순절한 아군의 코와 귀를 베어갔다. 왜장들에 의해 끌려간 포로는 히라도 경매장에서 당시 화폐 2원씩에 팔었고, 베어간 코와 귀는 일본의 오까야마 비젠시와 교도(京都)에 묻쳐 코무덤, 귀무덤으로 남아있다. 구마모도시에서는 매년 9월 15일이면 임진 정유재란의 전승을 기념하는 「보시타축제」가 열리고 있다. 남원에는 순절한 사람들의 넋을 모시고 있는 만인의총이 있다. 지난 9월 26일은 만인의사 순의 414회 제향일 이였다. 제주인 도지사나, 부지사 모두 불참하고 문화관광 국장이 대행한 제향은 쓸쓸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만인의총 기념관에는 당시 전투에 사용되었던 무기가 전시되여있지 못해 기념관을 찾는 분들게 큰 실망을 주고 있어 기념관을 고무기 박물관으로 만들고 전시할 무기류를 구입 전시하고자 하나 부족한 예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여 남원문화원 남원학연구소와 전투에 참여하였던 접반사 정기원(의정부 좌찬성 우부승지) 동래정씨 문중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의정부 좌찬성 전라병마 절도사) 이씨 문중에서, 사회각계 각층에서 노력하고 있으나 행정과 정치권에서는 적극성이 부족하다. 그뿐 아니라 남원성 잔존부분 220m 구간의 복원공사를 시작한지 20여년이 지냈건만 아직 완공하지 못한 문화재청에도 원성이 많다. 나라가 루난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지역과 신분을 초월 떨쳐나서 나라를 구한 조상들의 애국, 애족 정신은 우리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졌을 때 보여준 호남인(전라인)들의 저항 정신은 침략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12세기말엽 강대국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삼별초군과 함께 끝까지 항전한 호남인들의 기개는 몽골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황산대첩과 진포대첩, 임진왜란 진주성싸움에서 호남의 의병들은 누구보다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호남인은 왜군의 가장 무서운 상대가 되었다고 한다. 호남인의 강한 민족성, 저항정신을 제압하지 못하면 조선을 점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왜구는 정유재란때는 전라도를 주공경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여 왔던 호남이 특히 전북이 소외되고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우리는 조상의 애국정신을 받들고 그 정신을 이어가며 오늘의 풍요에 자만하거나 나라가 4색으로 나누어지고 역사를 모르는 민족이 되어 가서는 아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