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성 잔존부분 복원을 위해
시민은 앞장서고 공무원은 뛰어야 한다.
남원학연구소
노 상 준
공무원이 뛰어야 지역이 발전된다는 말은 명언이요 낙후된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울부짖는 말이다. 우리고장 공무원은 / 정치인들은 지역발전을 위하여 얼마나 뛰고 있는지, 남원시는 시장이 공석이 되고 부시장이 시장권한 대행체제가 되면서 더욱 분발한 것 같다. 20여년 중지되었던 남원성 복원사업이 다시 시작되고 도시가스관 매설공사가 착공되면서 시민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2008년 9월 중순 남원문화원 남원학연구소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과 문화재청에 남원성 잔존부분 복원공사를 계속하여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동년 10월 20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복원사업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중단되었던 남원성 잔존부분 212m 구간에 여장과 치첩, 양마장, 해자, 문루 등 복원을 관리단체인 남원시와 협의하고 향후 관계전문가의 고중과 사업 타당성 조사 등 종합적으로 검토·처리할 계획임을 알려왔다.
그러나 말로만 끝인 호사스런 공문에 불과하였다. 남원의 많은 문화재중 관광자원으로 남원성 잔존부분 복원과 광한루원 주변 재개발 사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원성은 정유재란때 내륙에서는 가장 큰 싸움이 있었던 곳이며 만인의총은 남원성에서 순절하신 군・관・민 일만여명의 충혼이 묻혀 있는 곳으로 1612년(광해군 4년) 조정에서 충열사를 창건하고 묘역을 만들었으며 출전하였다. 죽은 군마의 무덤(마총)이 있었으나 실전되고 마총길이란 길명만 전해온다. 임란 후 폐허가 된 남원성은 1692년 복원되어 호남을 사수하는 옹성으로 위용을 자랑하였으나 동학농민혁명 때 동문∙남문이 소실되고 일제 때 묘역 가까이 철길을 내고 묘지위에 남원역 폐탄 저장장을 만들어 오염시켜 버리고 남원성도 무너트리고 말았다.
광복 후 1964년 시민의 염원과 (故)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하신 주선으로 만인의총을 남원시 향교동 왕산 남쪽에 이장하고 성역화하여 사적(제298호)으로 지정보호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 때 헐어버리고 일부 잔존한 남원성 북벽 일부구간(212m) 유구가 있는 곳에 성곽 정비사업과 복원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어려운 시 재정과 역대정권에서 소외되어 1989년, 1997년, 1998년, 1999년 4회에 걸쳐 조금씩 성벽 복원사업을 하다가 중지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시민의 염원은 남원성 잔존부분을 옛 본래의 모습같이 북문(옹성)도 만들고 현재 쌓아놓은 성벽위에 치첩과 여장, 치성을 만들고 양마장, 해자를 만들어서 비록 일부분이지만 완성된 남원성의 모습으로 가꾸어지기를 남원시민들은 고대하고 있다.
또한 만인의총 기념관에 임란싸움에서 사용되었던 무기종류가 전시되지 못해 만인의총을 찾은 관광객이나 참배객에게 너무 큰 실망을 주고 있어 80년도 KBS와 더불어 임란무기 수집운동도 전개한바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민은행과 남원시민들로부터 갑옷과 화살촉, 승자총 몇점이 기증되었을 뿐이었다. 그 뒤 2007년 9월 남원학연구소에서는 만인의총 기념관을 임란무기기념관으로 만들고자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도지사와 남원시장에 건의, 도지사로부터 9,000만원의 지원을 받아 현재 무기구입의 1차사업이 시작되어 천자총통, 황자총통, 지자총통, 수노기, 창, 조총, 삼연자포, 비격 진천뢰, 구포, 쇠스랑 등 복제품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남원성은 정유재란 최대 격전지(사적 298호)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고 조선시대에 다시 크게 수축한 양마장이 있는 전국유일의 전투성으로 인근의 피난성인 교룡산성과 같이 호국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우선 남원성의 일반적인 현황으로는 둘레는 약 3.5K(동벽 866m, 서벽 850m, 남벽 870m, 북벽 855m, 성내 넓이 740.025㎥(223,858평)이고 높이 5.4m(18척), 치성 16개소, 옹성 4개와 4대문, 치첩 1,016개, 여장이 높이 있었고 양마장, 해자(넓이 6m)와 마면 16개소가 있었던 조선시대 유명한 백제식 읍성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 5만 6천과 대항해서 조선군은 1천명 주민과 명나라 양원이 이끈 요동기마병 3천여명이 연합하여 싸웠던 남원성 전투(1597년 8월 13~16일)는 임진왜란사에 가장 처절한 싸움이었던 곳이다. 당시왜장이 그렸던 작전지도에도 양마장과 치성 등이 잘 표시되어있고 치성과 4대문에 대포를 장착하고, 양마장에서는 기병이, 성곽위에서는 포병과 군사들이 왜군과 대전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에 참가한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과 서애 유성용(1542~1607)이 쓴 징비록, 왜군종군승 겸념이 쓴 일기를 보면 얼마나 전투가 처절하였는가 알 수 있다. 이때 아군 일만여명이 순절하였고 성내에는 집 한 채 없는 초토가 되었고 왜병은 전승을 알리고자 순절자의 코와 귀를 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어 교토에는 귀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이때 광한루와 용성관을 비롯 남원의 모든 문화유산은 전부 소실되고 석조 문화재만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도공을 끌어다가 일본 도자기 문화를 이루게하였으며 선량한 우리 백성과 포로를 끌어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일본 나가사기히라도 노예 경매장(풍신수실이 만든 히라도항에 있는 노예경매장)에서는 당시 화폐로 2원씩 받고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 동남아, 유럽일대(포르투갈, 스페인, 이태리 등)에는 「코레」라는 성을 갖는 사람이 있다. 코레성을 갖은 사람은 임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잡혀 노예로 팔린 조선인 후손임을 알 수 있고 일본의 사스마야기, 아리다야기의 선조들은 모두 조상이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임을 알 수 있다.
남원에 전해오는 고전 중 유몽인(1550~1623)이 남원부사 시절(1612년)에 쓴 홍도전을 보면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정생과 홍도라는 부부가 남만선(포르투갈,스페인 노예선)에 노예로 팔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현대판 이산가족상봉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년전 MBC에서 방영한 「안토니오코레」라는 이태리 사람도 정유재란 때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의 후예였음을 알 수 있다. 이태리나 포르투갈, 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전화부를 들춰보면 코레성을 갖은 분이 많은 것을 본다.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그분들의 후예들이 선조의 고향을 찾기 위해 남원을 찾아온 “코레성”을 갖은 여대생 2명을 만인의총 기념관 앞에서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선조의 고향이 「코레」요, 「남원」지역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고향이란 확증을 줄까하고 생각하다가 남원문화원에서 간행한 3대고전중 홍도전을 펼쳐들고 그 내용을 설명하고 정유재란 때 홍도라는 여인이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려 남만선(포루투갈, 스페인, 노예선)을 타고 동남아로 항해 중 구사일생으로 살아올라온 이야기와 당시 인도주재 고아에 있는 포르투갈 상사가 풍신수길에게 감사장을 보냈는데 내용은 자기들에게 많은 노예를 팔아주어 감사하다는 감사장이라고 하며 일본대판성 박물관에 걸려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누고 홍도전이 담긴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다. 남원을 찾아온 외국인 중 이태리인,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오신 관광객은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에 깊은 관심을 갖는 분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원은 가장 중요한 전적지 문화재 남원성 잔존부분을 본래의 모습대로 완전하게 복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원시민들이 앞장서야 하고 남원시가 뛰어야 한다. 정부에서는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원사업에 노력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남원시에서는 남원성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학계의 자문을 거쳐 복원 설계안을 내놓고 적극 추진하고 있으나 많은 예산이 걱정이다. 남원성이 복원되고 만인의총 기념관이 고무기 기념관이 되면 전적지로써 위상이 높아질 것이고 이를 이용하여 고무기 발사시범과 조명연합군의 사열식과 남원성 전투의 일면을 재연한다면 한중문화교류와 전적지로써 관광지로써 광한루원과 더불어 관광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