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교란작전 후 태백산맥을 통해 북으로 후퇴 중)인민군은 끊임없이 낙동강을 도하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에게 낙동강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간혹 낙동강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소부대들은 전멸을 당했다. 시체는 손을 대면 탄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원자탄의 일종인 네이팜탄에 희생된 것이다.
인민군의 도강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며칠쯤 지났을까, 미군비행기가 계속 북쪽하늘로 날아가고 미군 트럭들도 밤낮없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미 서울이 함락되었고 인민군들은 모두 북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을 도강하여 적진 깊숙이 최남단 까지 침투 해 있던 이현상부대도 뒤 늦게 평양을 향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꼭 두 달간의 낙동강 시절이 막을 내렸다. 단숨에 서울을 함락하고 대전을 무너뜨렸던, 그 막강했던 인민군의 그 어느 부대도 넘지 못한 낙동강을 넘어 백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수 십 군대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고 적진사이를 누비고 다니던 이현상부대는 결국 먼저 후퇴한 인민군의 뒤를 따라 북으로 향해야 했다(빨치산의 딸 2-240p)
1950년 10월 2일 이현상부대는 영천을 통과하여 영일,양양, 울진의 동해안 도로를 따라 북진하다가 태백산맥을 타기 시작했다. 앞서간 인민군들도 태백산맥을 타고 후퇴했는지 거친 산길은 반질반질 잘 닦여 있었다. 올라갈수록 부대 뒤에 따라 붙은 낙오병과 피난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넘어 38선을 넘을 때는 거의 만 여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현상과 박종하는 누구든지 의지해 오는 모든 인민은 돌보고 보호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백 명이 안 되는 부대로 만 여명을 규합하여 안전하게 후퇴한 이현상 부대는 참으로 대단했던 것이다. 이현상부대 전원은 말끔한 미군복으로 빼입고 번쩍거리는 엠원을 든채 좌우 어깨와 허리에 탄띠를 두르고 미제 수류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하루에 오십 킬로씩 고되게 행군했던 것이다. 비록 후퇴 중이긴 했지만 낙동강에서 대단한 전과를 올린 이현상 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38선을 넘기만 하면, 평양에 가면, 그들은 자신들의 꿈과 휴식이 이루어 질 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옥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현상부대원으로 북상길에 올랐다. 주먹밥 하나도 소화시키기 어려운 병중에서도 하루 오십 킬로의 행군을 했다. 내리막길 같은 곳은 아예 데굴데굴 구르면서 그녀는 대열에서 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 못지않게 고통스러워 한 사람은 하수복이었다.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이현상부대는 삼팔선을 향해 부지런히 내달렸다. 태백산맥에는 어느새 겨울이 오고 있었다. 10월 중순 이현상부대는 양양에 도착했다. 드디어 38선을 넘은 것이다. 38선을 넘었다는 감격에 겨워 이현상부대는 환호성을 지르며 양양 어느 마을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마을에는 노인네와 아낙네 몇 사람뿐 모두 피난을 가버렸다. 38선만 넘으면 대단한 환영을 받을거라고 믿었던 이현상부대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계속 화천·철원을 지났고 철원고원에서는 미군과 맞부딪쳐 격퇴하고 평강으로 들어갔다. 후평을 일 킬로쯤 앞둔 지점에서 이현상부대의 척후가 숨가쁘게 이현상에게 달려왔다. “이승엽 동지가 오십니다.”
“뭐?”
놀란 이현상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는데 곧장 백마를 타고 달려온 이승엽이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와 “현상이 살아있었구나.”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는 땅바닥을 데굴데굴 뒹굴며 반가워했다. 이승엽은 널리 알려진 대로 박헌영을 다라 월북 후 북한에서 한 때 사법상을 지냈으며 6.25초에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여 서울시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총사령관‘ 직함을 가지고, 인민군 낙오병과 남조선의 당 기관원들이 태백산맥을 통해 수없이 북상 중이라는 말을 듣고 그들을 수습, 유격대를 재편성하기 위하여 십 여명의 수행원을 끌고 내려오다가 뜻 밖에도 오랜 동지 이현상을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이현상이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훈련을 마치고 헤어진 후 3년만에 재회한 것이다. 큰 키에 얼굴이 길쭉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이승엽은 이현상 부대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악수를 나눴다.
“이쪽은 이옥자 동무로 부부가 모두 빨치산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고생이 많았소.”
이승엽이 박종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힘차게 쥐었다. 이옥자도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이승엽 동지를 만나게 되어 가슴이 설레었다. 이승엽은 소 돼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이때 계속 북진 중이던 미군은 이미 10월 26일 경에는 후평보다 훨씬 위쪽과 원산, 평양, 산외구 등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후평까지는 적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안전지대였다. 그때 중국군이 참전해 미군을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며 승승장구 남진 중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현상의 친구이자 북한 정권의 요직을 맡고 있던 이승엽은 후퇴하던 유격대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고 11월 10일경 정식으로 부대가 재편되었다.
승리사단(약500명)-사단장 이진범, 정치위원 유금목
인민여단(약 170명)-사단장 김재연, 정치위언 김상동
혁명지대(약 130명) -사단장 서홍선
본부(약60명). 무려 860명에 이르는 대부대였다. 부대의 정식 명칭도 조선인민유격대 4지대로 바뀌었으며, 통상 남반부 인민 유격대로 불렸다. 드디어 남부군이 창설된 것이다
남한지역 6개도당 유격대를 통괄하여 지휘하는 조선인민유격대 산하 '남반부 인민유격대', 통칭 남부군으로 재편성된 것이다. 이미 구성되어 있던 3개 병단을 포함해 이들 전체를 남부군으로 통칭하여 이현상이 총사령관을 맡았다. 50년 11월 10일 이었다. 총참모장엔 박종하, 정치위원엔 여운철, 부정치위원엔 모스크바유학을 마치고 김일성대학 교수를 지냈던 차일평이 임명되었다.
부대 재편이 끝난 며칠 뒤 소집명령이 내렸다. 무슨 의식이 거행될 모양으로 이현상, 박종하는 낯모르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대열 앞으로 나가 일렬로 섰다. 이진범이 사회를 보았다. "오늘 중앙 간부들을 모시고 남조선인민유격투쟁에서 영웅적인 투쟁을 한 동무들에게 시상을 하게 되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의식을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국가제창이 있겠습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기고 길이 받드세
처음으로 마음껏 불러보는 국가였다.
“이번에는 혁명선열 동지들에 대한 묵념이 있겠습니다.”
이진범의 말이 끝나자 낙동강시절에 어디선가 나팔을 하나 구해 배낭 뒤에 매달고 다니던 한월수가 나팔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애잔한 진혼곡이 흘러나왔다. 서러운 곡조였다. 낮게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걷잡을 수 없는 통곡으로 변 했다. 잠시 후에 이현상이 단위로 올라가 김일성이 지리산인민유격대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그 동안의 투쟁을 치하하는 시상식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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