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남원에 사는가?
한 병 옥
모든 생명에게는 모태의 선택권이 없습니다.
이는 곧바로 삶의 터전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로 선택받은 생명은 태어난 자리에서 단 한치도 옮기지 않고 천년 수명도 다 해야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가혹한 원죄로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른 창공을 비상하는 새라 해서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지점에서 2km를 벗어나기 어려운 여건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고 수천 km를 이동하는 철새들도 선조 선배들의 항로를 이탈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보면, 모든 삶의 터전에는 일정한 궤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궤도를 이탈하려 몸부림치는 동물이 있습니다. 인간이지요.
호기심이 엄청 강합니다. 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옮겨 다니기를 즐깁니다. 다른 짐승들 모양 일정한 거처를 두고 오간 경우가 많으나 아예 가족을 모두 이끌고 삶의 거처를 옮겨버리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 고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메리카나 유럽으로 옮겨 가 버리기도 하는, 지구의 어느 구석으로도 옮겨 다니는 능력을 확보해 놓고, 이제는 자기들이 더럽히고 오염시킨 지구는 싫다고 아예 달나라도 벗어나 행성으로 날아가 버릴 연구까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한 자리에 고착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면서' 거주 이전을 제도화 해 놓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는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이동에 그칩니다.
대규모 이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씨족이나 부족이 집단 이동을 하는 경우지요.
이는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이동의 거리도 장거리인 경우가 많겠습니다.
이 집단이동은 좋은 기온, 좋은 토질, 좋은 교통 등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는 명목상의 경우이겠고, 대체로는 패거리 다툼에서 밀려난 집단이 함께 이주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우리 한(韓)민족은 바이칼 호수 서쪽이 그 시원이라 하는데 어떤 경우에 처하여 몽골,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을까요?
천부지지(天府之地)에 주어진 타의(他意)
남원인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을 백성(百姓)이라 하지요? 여러 성씨가 모여 산다는 뜻이겠습니다.
그 많은 성씨에는 또 본관이라는 것이 있지요? 여러 지방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옮겨 살다가 어느 지역에 멈추어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삶의 터전이 됐을 것입니다.
우개-우물 안 개구리의 준말, 필자가 필자를 가리키는 말-의 경우 시조 할아버지께서 거점(주거지)을 확보하신 곳이 청주여서 청주 한씨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지금 남원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성씨든지 대체로 그럴 것입니다. 시집, 장가를 가서 주거지가 변했든지, 난을 피해 어느 지방으로 긴급 이주해 정착하게 되어버렸다든지. 그렇게 옮겨 다녔지 500년 1,000년을 그 지방 그 곳에서 살아왔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단 외부에서 떠돌다가 원적지로 돌아가 정착한 경우는 있겠지요.
우리 남원에는 다양한 성씨와 본관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데 언제 어떤 연고로 하여 지금 이 고장 남원에 살고 있는가를 추적해 본다는 것은 낮잠 자는 일보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남원에서 살다가 떠나버린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남원에서 살든, 떠났든 간에 그것이 자의냐 타의냐에 있습니다. 줄여 말하자면 현재의 남원인은 남원에 살고 싶어서 사느냐 어쩔 수 없이 사느냐 혹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사느냐 그 선상의 어느 지점에 내가 있느냐 하는 것이겠습니다.
우개의 경우 선천적으로 주어진 조건으로 남원 사람이 되었고, 그 남원에 거부 반응이 없었으며 그 거점에 만족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남원 사람으로서의 자존이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느 잘난 사람은 잘 난대로 못난 사람은 못 난대로 떠났습니다. 무수히 떠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남원에 붙박여 풀이 죽어서 살고 있는가? 나는 못난 솔이 선산 지키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는 사람인가?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남원을 선택하여 들어와 삶의 터전을 꾸리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
우개는 자문해야 했습니다. 선천적 피상적 타의가 아닌 능동적이고 자의적인 이유, 그 무엇인가가 있는가?
자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원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원인으로 남고 싶었고 남원인 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습니다.
남원은 천부적인 면에서 어느 지방에서도 비교하기 어려운 강점을 고스란히 모아놓은 고장입니다. 삼신산 중의 하나이면서 천하명산인 지리산 쪽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천부지지 옥야백리라는 명당이 남원입니다.
바다가 펼쳐져 있지 않은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그 바다의 자리에 평야가 자리한 고장입니다.
지리산 정기가 빚어낸 맑은 물과 빼어난 인물들은 남원인 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문화와 예술을 창출해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계의 소리 중에서 빼어난 민족의 소리 판소리를 창출해냈고 남원이 없으면 우리의 고대 소설은 없다 할 만큼 고대 소설의 본향이 남원입니다.
그 소설들의 배경이 남원이라는 그 자체가 그만큼 빼어난 고장이라는 것이며 그 판소리와 소설에 쓰인 언어가 남원 말인 것은 그 작가가 남원 사람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지은이를 모른다는 것이 흠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만들어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지요. 전국을 다 뒤져도 이만한 고장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개는 양이 차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원이라는 지역에 주어진 조건들로서 타인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일 뿐, 우리가 남원인 이고 싶다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한 쪽이 허전하고 허기진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욕심이 과했다 해야 할까요?
이 배고픈 과정에서 몇 가지 일화를 겪게 됩니다. 하도 여러 번 얘길 해서 귀가 아프실 분도 많겠지만 한 번 더 읊어야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허기(虛錡)
첫 번째 일화.
큰 애가 중학생일 때 함께 선원사 앞을 지나고 있는데 승용차(그 때는 승용차가 드물었다)가 서더니 아들에게 어데 가 볼만한 데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느닷없는 질문에 아들이 머뭇거려 내가 나섰습니다. 관광지를 가려느냐 유적지를 찾는 것이냐? 대답은 아무데나 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당황했습니다. 임기응변으로 육모정을 안내해 주었는데 그 자리에서 안내해 주기가 가장 쉬워서 였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우문우답이었습니다.
차가 떠난 뒤 혼자 자책이 심했습니다.
기본이 확립돼있지 않았다는 생각과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런 물음을 받았을 때의 대비에 대한 교육은 고사하고 나 스스로 이 모양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이 정도라면 다른 학생들의 수준은 또 어느 정도일까 하는 생각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일화.
35년 전의 전후에는 한가롭게 산에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아침에 도시락이나 대용 식품으로 출발해 저녁 무렵 돌아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자연히 남원 시가지를 중심으로 코스를 정하는 것이어서 남원의 산을 타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풍화작용에 의해 쏟아져 내린 너덜겅 같은 지대를 거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냥 그러고 다녔습니다. 이 지대가 백두대간 능선이었는데 그 때는 백두대간이라는 말을 들어 본 경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그 능선이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고 백두대간이었으며, 그 국경 능선에 가야나 신라가 성을 쌓았고, 그 성이 무너져 내린 돌을 풍화작용이 만든 너덜겅으로 짐작하고 넘어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사실을 알았을 대의 참담함은 첫 번째 일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소위 남원의 토백이-'본토박이'의 남원 사투리-가, 소위 선생을 한다는 놈이 신라, 백제의 국경 능선도, 그 국경에 쌓은 성도, 제가 밟고 다닌 그 돌 들이 성돌인 줄도 모르고 풍화작용의 너덜겅으로 알고 의심조차 해 보지 않았다니!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세 번 째 일화.
두 번 째 일화와 연결된 경우지만 국어 선생이나 잘 할 일인데 뭐한다고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 문고판을 어쩌다 구입하여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남원의 아막산성이 나오고 이 산성에서 일어난 사건들 얘기가 전개 돼 있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단언하지만 남원에 발을 디뎌 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쓴 책 속에 그 분은 남원의 역사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남원 토백이 나는? 그 때까지 나는 남원에 성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아막산성 이라는 이름조차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아는 것, 관심을 갖는 분야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수 십 년 전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가에게 남원의 삼국시대를 배워 알아야 한다는 것은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큰 충격이었습니다.
네 번 째 일화.
이제 남원에 대해서 뭔가 조금 눈 떠 가고 있다 할 때 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있었습니다. 대하소설 속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얘기가 나오고 그 과정에서 토벌군의 남원군 주천면 고기리 학살 사건이 나왔습니다.
전라남도 조계산의 선암사 산사 사람 조정래는 남원의 양민 학살 사건을 취재해 작품 속에 녹여 넣고 있는데, 남원 사람 나는? 더구나 내 고향 주천면 고기리라니? 또 겪어야 하는 충격이었습니다. 뒤에서야 알았지만 조정래 작가와 나는 동갑내기였습니다.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극복할 수 없는 격차를 수긍해야 한다면서 내가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1980년대 때, 우개가 40 중반 전후에 겪었던 일들인데 이 일련의 사안들이 우개를 바꾸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향 땅에서 살면서 고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길 안내조차 하기 어려운 내가 소위 '남원인'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기르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래도 되는가 하는 자성과 질책이었습니다,
더구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이럴 수는 없다는 자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앎(知)에도 선후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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