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단풍처럼 찬란한 노년의 삶
남원언론문화재단감사 서호련
에버그린(Ever green)- 상록수란 뜻이다.
그 안에는 나름대로 깊은 뜻이 담겨져 있겠지만 어떤 수목이 늘 푸르다고 멋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추의 계절 하면 역시 단풍을 떠 올린다. 내장산이나 설악산의 백미는 역시 만추의 단풍이다. 늘 푸른 소나무산을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몰리지는 않는다. 가을이 되면 진홍색 단풍의 불길은 정상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서서히 내려온다. 멋과 풍취가 도도하다. 그리고 난 뒤 만산에 눈이 덮인다. 겨울이 지나고 난 뒤에 산은 다시 연두색 초록으로 채색된다. 그렇게 자연은 변화되어 다시 초가을 그리고 만추로 이어지는 것이다.
산의 조화는 상록수에 의해서 연출되는 것이 아니라 활엽수가 주도한다. 참나무,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 같은 떡갈나무와 단풍나무들이다.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상록수가 모여 있는 산에서는 이러한 수채화를 볼 수 없다. 나이 75세라면 이러한 활엽수의 아름다운 단풍의 절정 같은 연대이다. 요즘은 ‘인생 백년 사계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인간의 수명이 120세로 나온다. 현대 의학자들도 비슷하게 125세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통계청에서도 현재 65세를 넘은 사람의 평균수명이 91세라고 발표 한 것을 보면, 인생 칠십은 옛말이고 인생 백세 시대가 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5세까지가 ‘봄’
50세까지가 ‘여름’
75세까지가 ‘가을’
100세까지가 ‘겨울’이라는 것이다.
또는 운동시합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25세까지는 연습기간
50세까지는 전반전
75세까지는 후반전
100세까지는 연장전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듯하다. 그렇다면 내 나이가 72세이니 나는 아직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만추이고 가을이란 후반전을 뛰고 있는 셈이다.
동양에서와 같은 회갑개념이 없는 서양에서는 대체로 노인의 기준을 75세로 보는 것 같다. 그들은 65세에서 75세까지를 ‘Young old (초로)' 또는 'Active retirement(활동하는 은퇴기)라고 부른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아직도 사회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라는 것이다. 결코 노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시니어 시티즌(Senior Citizen)‘이라고도 부른다. 지혜와 경륜, 경험이 많은 세대란 뜻이다. 우리말로는 어르신, 원로쯤에 해당된다.
육체적 연령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젊음이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70세 노년에게 청춘이 있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늙음이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상과 열정이 살아있는 한 젊은이다. 열정과 경륜, 건강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이만을 따져 능력을 펴보지 못한다면 국가와 사회에 손실이 된다. 후대들 역시 우리의 어버이들이 평생을 바쳐 이 국가와 사회와 가정을 위하여 희생하였던 그 노고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1973년에 96세로 타계한 금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93세 때 UN에서 조국 카탈루나의 민요인 ‘새의 노래’를 연주하고 평화에 대한 연설을 하여 세계인들을 감격케 했다. 49년간 미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하다가 91세 된 저지난해 은퇴한 헬렌 토마스 기자도 ‘영원한 현역’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기에서 건진 세기의 정치가들-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일본의 스즈키 간타로 수상, 영국의 쳐칠수상,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 중국의 등소평 주석, 그리고 재작년에 임기를 2년여 남겨두고 92세 나이로 타계한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 그리고 미 워싱톤주의 현역5선 상원의원인 올해 78세의 한국계 신호범의원. 이들은 모두 80세 전후의 노장들로서 젊은이보다 더 젊은 꿈과 열정을 가지고 산 세기적인 지도자들이다. 시대가 어렵고 국제관계가 복잡 할수록 이를 풀어 나가는 데는 혈기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소통과 화합을 이루어내는 원숙한 경륜이 필요하다. 세대교체, 세대교체가 능사만은 아닌 것이다.
3년 전 나의 고희 때 외국의 한 교우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Dear brother, 70years are how ever not only a historical event but also a renewal for the future." (사랑하는 형제야, 70의 고희란 역사적인 기념일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시작이라네.)
물론 생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한 인생이 될 것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역시 만추의 가을이다. 그것은 비단 색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경륜과 지혜와 열정, 그리고 인고가 서려 맺게 한 열매 같은 것이 매달려 있는 풍요와 감사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니어들이 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어느 날, 남원의 요천강가 붉은 단풍나무 아래 앉아 서산에 물든 황금빛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 노인이 어른거린다. 풍상을 겪은 그 노안엔 허무와 시름이 가득하였다. 선비화가 이인상이 그린 ‘단풍을 보며’라는 화폭엔 다음과 같은 당나라 두목의 시구가 적혀 있다.
수레 멈추고 단풍 숲 늦도록 쳐다보니
서리 맞은 잎이 이월 봄꽃보다 붉구나.
가을은 숙살(肅殺)의 계절이란다. 젊은 여자는 봄을 타고, 늙은 남자는 가을을 앓는다고 했다. 갈바람에 울적한 ‘백거이’도
취한 내 모습 서리 맞은 단풍
발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 라고 했다.
구르몽은 그의 시 낙엽에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고 했다. 여름날 그렇게 풍요롭던 푸른 나뭇잎들이 단풍이 되어 결국 덧없이 대지위로 흩어진다. 그러니 그러기 전에 서로 가까이 다가와 사랑하자고 짓밟히는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고 했다.
어이 동무야, 어린잎- 푸른 잎-단풍, 그리고 영혼처럼 우는 낙엽. 이 모두가 찬양해야 할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백거이 처럼 취한 내 모습 서리 맞은 단풍 이라고 자조 해서도 아니 될 것이네.
자유게시판 > 신문고·자유게시판 129 페이지
13-11-10 11:3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