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북한 김조선은 사전에 중공과 소련의 남한 자유대한민국을 침공하여
공산화를 시키는데 합동으로 공모를 하고 침공을 해왔습니다.
이는 김조선. 중공. 소련이 전범국가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전범국가들에게 대한 전쟁피해청구권을 청구해서 다시는 침공을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기습침공으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이 되자
소련은 중공과 미국의 결투장으로 만들어 힘을 빼놓기 위해 김일성에게 한강 이남은
남로당의 게릴라전으로 함락을 하라며 정지령을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긴급파병과 유엔회의에서 소련의 고의적 회의에 불참으로
유엔군의 파병이 만장일치로 결의가 되자 소련 스탈린은 한강 이남으로 진격을 해도 좋다는
승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조선은 서울.경기.강원. 충청. 전라 지역에서 남로당 조직을 통하여 15세 이상 30세
이하의 남한의 청년들의 전쟁터에 강제징집을 내리게 됩니다.
1가정에 1명을 강제동원을 하는 것인데 반대하면 그 가정은 반동분자로 낙인 찍어서
전체를 공개총살을 하기 때문에 남자가 없으면 소녀가 동원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고 하며,
호구조사가 나오면 뇌물을 써서 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구조사 나왔다! 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속담처럼 있는 것입니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지라 전쟁터에 끌려가면 죽는다고 여겨서 아들 대신에 딸을 보내는
경우들도 있었는데 여자들은 낮에는 밥하고 빨래하고 밤에는 공산군들의 공짜 성노예가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공산군 10명에 종군 위안부 1명의 비율로 있었다고 합니다.
끌려간 소년병이나 소녀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시 단 한 명도 귀향조치도 안하고
생존자들은 모두 강제로 북한으로 데리고 가서 종군위안부 소녀들은 중공군의 성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소년병들과 성노예가 된 소녀들은 상당수는 낙동강 전투에서 죽고 생존자들은 북한지역으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무려 90만명이 강제로 끌려가서 행방을 모르게 되어 가정에서는 신원문제로
모두 행방불명 신고로 처리하였는데 그 숫자가 90만명이 넘었다고 국방부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남로당과 공산군이 인민재판 등으로 민간인 학살만 해도 20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태평양 전쟁시 전쟁특수로 징병인들이나 위안부들이나 신청을 받아 일본으로
산업공장으로 모집을 간 분들이나 고임금을 받아 돈을 긁어서 전답을 사고 가게와 집으로 사는 등의
빈민탈출을 하였던 것에 비하여 공산국가 김조선과 중공과 소련의 합작침공을 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지옥과 생명과 재산을 잃고 세계 최하위의 빈민국이 되게 만든 전쟁이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전범국가 중공과 김조선과 러시아에 전쟁피해청구권 운동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