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과 비서 선우진, 그리고 살해범 안두희
( 백범 서거 63주기에 즈음하여)
남원시민신문사. 지리산고향뉴스 논설고문 서호련
6월 26일은 백범 김구선생 63주기이다. 서울 효창동 백범 기념관에서는 백범의 63주기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다음은 한국일보 손용석기자의 [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54> 흉탄에 쓰러진 백범 김구 선생에 관한 기록이다.

• (1992년 2월 28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묘소를 참배한 안두희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 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0분, 서울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에서 4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민족의 지도자이자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의 가슴에 쏘아댄 총소리였다.
73세의 노정객의 목숨을 앗아간 안두희는 손에 권총을 쥔 채 순순히 검거되면서 태연하게"선생은 내가 죽였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범인이 잡혔고 준비된 암살임이 확연했으나, 6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역사적 배후설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게 없다.
헌병사령부로 연행된 안두희는 백범이 남북협상에 임함으로써 정치 사회가 혼란에 빠져 그를 죽이게 됐다고 살해 동기를 진술했다. 그 해 8월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된 안두희는 석 달 뒤 징역 15년으로 감형됐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수사 발표를 통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의 단독 범행이라 결론지었다.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이던 안두희가 당수인 백범을 찾아가 정치 문제에 관한 언쟁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또 안두희가 복역 중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형 집행 정지처분을 내려 석방시킨 후 군에 복귀시켰다가 국회에서 그의 석방과 군 복귀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자 소령으로 예편시키는 등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그를 보호했다. 안두희는 예편 후 강원 양구에서 군납업자로 활동하며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60년 4ㆍ19혁명 이후 백범 암살사건의 진상과 안두희에 대한 재처벌 요구가 계속됐지만 장면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사건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두희의 부분 진술이나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종합해보면 백범 암살사건은 배후가 있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행임을 짐작하게 한다.
96년 10월 안두희는 민족지도자로 존경 받던 백범 암살범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백주대로를 활보하는데 분노한 시민 박기서의 몽둥이를 얻어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박기서가 사용한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2009/05/20 00:56 정운현
‘백범 비서’ 선우진
임천에서 한광반 훈련을 마치고 1944년 11월 하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향한 선생 일행은 이듬해 1월말 임시정부에 도착했고, 거기서 백범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 선생은 23세 청년이었고, 백범은 선생에게 ‘조부나 다름없는’ 69세였습니다.

해방 후 백범 일행과 함께 환국하여 경교장에서 백범 비서로 활동한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만 4년여 백범을 곁에서 모셨습니다.
백범을 수행하여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백범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봐 왔습니다.
백범과의 이런 인연으로 주변에서 회고록 집필을 종용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부터 지난 일을 구술하여 선생은 지난해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서강대 최기영 교수가 정리한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 刊)이 그것입니다.
빈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그 책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그간 선생이 회고록 집필을 오랫동안 사양해온 이유가 ‘서문’에 적혀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의 서거가 나의 불민(不敏) 때문이라는 자책이 그 한 이유였다”
회고록 제8장 ‘그날’ 편에 백범이 서거하신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셨더군요.
“(1949년 6월) 26일 11시경 창암학원의 책임을 맡은 여선생을 불러 학교 일을 의논했다. 창암학원은 백범 선생이 피난민이 많던 마포구 염리동에 설립한 학교였다. 11시 30분경 포병 소위 안두희가 찾아와 백범 선생을 뵙기를 청하였다. 안두희는 일전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김학규 선생의 소개로 경교장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가 백범 선생이 손님과 면담 중이라 하자 안두희는 비서실에서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안두희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때 내가 왜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지 지금도 죄책감이 든다. 그날은 한가했지만, 그래서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날이다...여선생이 돌아간 후 안두희는 강(홍모) 대위에게 먼저 백범 선생을 뵈라고 답했다...
10여분 뒤에 강 대위가 2층에서 내려왔다. 안두희가 일어나자 내가 2층으로 안내를 했다. 백범 선생은 휘호를 쓰려는 듯 의자에 단정히 앉아 계셨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때가 12시 40분을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선생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모 아주머니가 만둣국이 다 되어간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정신이 멍해졌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백범 선생 방에서 바로 나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별안간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급하게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2층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래층에서 이풍식, 이국태 비서가 뛰어 올라가려는 순간, 안두희가 권총을 계단에 철커덕 떨어뜨렸다.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국태가 먼저 서재로 뛰어 올라갔다. 나도 뒤따라 층계 위를 내달렸다. 허벅지와 무릎이 욱신욱신했다. 온몸이 바짝 긴장이 돼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백범 선생의 방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선생의 얼굴과 오른편 가슴에 유독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오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먼저 백범 선생을 의자에서 내려 방에 눕혔다.
“적십자병원에 가서 의사를 데려와! 어서!”
이국태에게 미친 듯 소리쳤다.
백범 선생은 고개와 팔이며 다리를 늘어뜨린 채 말이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울부짖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순간 나도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는데, 안두희의 권총이 눈에 선명하게 다가왔다. 입술을 깨물고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안두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풍식 씨가 의자로 때려눕힌 것이었다. 나도 격분해 의자를 들어 안두희를 다시 후려갈겼다.
그때 갑자기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3~4명이 나타나서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재빨리 안두희를 일으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마침 이때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이 달려왔고, 안두희를 경찰서로 연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괴청년 서너 명이 더 나타나 경비주임을 막았다. 경찰이 어떻게 군인을 연행할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며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 밖에 있던 쓰리쿼터에 싣고는 서둘러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백범 선생의 수행비서로서 선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