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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나라 사람이여? 앞뒤로 영어 써있는 옷이나 입고 다니고…쯧쯧』 대뜸 지나가는 학생을 불러 세운다.
호통을 친다. 느닷없이 옷을 벗긴다.
그리곤 걸망에서 주섬주섬 염색물감과 붓을 꺼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당황해 멈칫거리는 학생에게 전광석화처럼 하얀 티셔츠를 입힌다. 그리곤 눈처럼 하얀 옷에 우리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색동옷을 입은 붓이 요동치며 춤춘다. 그림 그리기 10분. 마침내 하회탈이 미소를 머금으며 하얀 옷 위에서 웃고 있다. 『됐어, 이젠 가봐』 그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머리엔 삼으로 짠 베레모형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목에는 작은 하회탈을 걸고 아래 위는 개량한복 모양의 갈옷을 지저분하게 걸쳐 입었다.
신발은 미투리. 손때묻은 지팡이를 짚고 어깨엔 걸망을 하나 둘러멨다. 영락없는 도사차림. 누굴까? 그는.
석운 윤병하선생(73).
우리얼을 심는 전통문화 지킴이. 하회탈 기능보유자. 재야 민속학자….
그를 일컫는 말은 줄을 잇는다. 재주도 많고 옷차림도 특이하고 박식하기 때문이다. 탈춤 풍물에서 민화에 이르기까지 이론과 실기가 「인간문화재급」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사는 동네선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지리산 자락 남원인근 대촌마을.
그가 지금 사는 곳이다. 그곳에선 「지리산 도사」로 통한다.
고희를 훌쩍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 두번은 지리산에 오른다. 지리산 칠선계곡에는 그의 「전용 목욕탕」까지 있 을 정도다.
『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림을 그려주느냐고? 그건 우리 얼을 심어주기 위해서지. 양키옷을 입으면 자신도 모르게 양키물 이 들거든. 전통이 뭐고 우리 것이 뭔가. 끊어지지 않고 흘러온 하나된 맥의 흐름이 전통이 아닌가. 우리 것은 학자들의 논리나 연 구로 지켜지는게 아니여. 우리 정신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민초들이 우리 것을 지켜가지 않으면 우리문화는 사라지고 말어』
그의 고향은 곡성 들판. 명문대가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선친대까지는 떵떵거리는 부자였다.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생활할 정도였다. 대궐같이 큰 집엔 소작인들과 하 인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집안에 한학 글씨 그림을 가르치는 독서당이 있을 정도였다. 독서당에는 내로라하는 선생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한학과 글 씨 그림을 익혔다. 실제로 9세 때 전국서예전에서 액자 등 2점이 입선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풍비박산났다. 좌우익의 대립과 공비토벌 와중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을 잃 었다. 그의 가족은 지주계급이라는 이유로, 또는 입산자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몰살당했다.
그도 한 때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숨어 지내야 했다.
그의 전통문화 보급과 우리 얼 심기의 뿌리는 해방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문화 말살기였던 일제시대.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적 사고방식은 많이 남아 있었다. 되레 해방후부터 우리문화와 얼은 목졸리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빼앗겼던 우리 말과 성을 되찾게 되면서 서양의 반자연주의를 교과서 삼아 우리얼을 스스로 짓밟았다. 우리얼을 말살시키는 최선봉은 학 교였다.
학교에서는 「우리」라는 공동체의식보다 「나」라는 미국식 개인주의를 심어주기에 바빴다. 심지어 무용 등 현장 무대에 출 연하면 퇴학시키기도 했다. 또 예술교육은 내면이 표현된 동작이 아니라 기교와 가락을 외워담기에 바빴다.
기교와 가락의 암기로 옛 조상들의 맛과 멋과 흥을 재현하기란 애당초 틀린 일이었다.
기교와 가락만 외우는 예술교육 안타까워
그는 유린당하는 우리 문화와 얼을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부에 항의도 했다. 교과과정의 절반 이상을 우리문화와 얼 을 가르치는 내용으로 바꿔달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마침내 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는 무용교과과정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말도 말어. 민속가무의 일부만이라도 알리고 보존하려고 미친 짓(?) 많이 했지. 초등학교와 여자고등학교에 찾아가 교과과목에도 없는 무용시간을 만들어 탈춤을 가르쳤지. 그 때만해도 전통문화라면 고리타분한 문화로 알고 있었거든』
독서당 스승에게서 배운 전통 가무는 무용 불모지였던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
그는 1947년 군무 「건설」을 필두로 1958년 전국민예술경연대회에서 「하회가면무」가 대통령상을 받는 등 수백차례 무용공 연으로 우리 전통가무의 터를 잡았다.
그는 또 국보 121호 하회탈 지정 때 국보에서 제외되었던 주지탈 2개를 국보로 추가지정하도록 만든 주인공이다. 지정 당시 조사 미비로 버림받았던 주지탈을, 끈질긴 추적과 발굴 끝에 하회탈의 원류임을 증명, 16년만에 빛을 보게 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인생은 험난하기만 했다.
늘 음지에서만 맴돌았다. 「현대민족무용학원」이라는 무용연구소를 통해 여러해 동안 땀을 쏟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조상 의 맛과 멋과 흥이 우러나 겨우 홀로 설 만하면 약삭빠른 이들이 빼가곤 했다.
그가 힘들여 써놓은 전통문화에 대한 논문과 저서는 그도 모르게 남의 이름으로 둔갑해 학술지에 발표되곤 했다. 그가 지은 「한국 무악고」는 민족무용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또 입에서 입으로만 이어지던 구전을 집대성한 「꺾여진 맛-멋-흥」은 전통사상과 문화의 보고이다.
그가 거리로 나서서 우리문화를 알리는 일을 시작한 것은 80년대. 미래의 주역들에게 우리 문화와 얼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대학강 단으로 대학로로, 미래주역인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윤병하의 전통문화 강연장」이 되었다.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붙들고 우리문화 우리얼을 강의했다.
티셔츠에 하회탈과 전통민화를 그려주며 우리문화를 퍼뜨렸다. 미친사람이라고 놀림받기도 했다. 대학로의 기인이라는 엉뚱한(?) 대명사로 불리기 도 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에게 손가락질받는 것은 잠깐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문화의 사라짐은 영영 찾을 수 없는 비참함 그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의 전통문화 보급에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대학생들이 탈춤과 풍물을 배 우러 그를 찾았다. 우리 것 우리 문화 붐을 아래에서 주도했던 것이다.
86년 그는 떠돌이 전통문화전도사 생활을 마치고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그곳에서 그만이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골. 해방공간 과 6·25에서 무수히 죽어간 민초들의 원혼이 떠나니는 곳.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적 아닌 적으로 만나 피를 흘리던 민초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죽은 나무를 찾아 화해의 탈을 새겼다. 곳곳에 장승도 만들었다.
그리곤 빌었다. 다시는 동족끼리 피를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그는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은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가 같아야만 쉽게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것 잊어버리면 남과북이 무엇으로 통일을 하겠어? 하나됨이 있어야 통일을 하지. 그 하나됨을 묶어주는게 전통문화야. 우리 것 잊어버리면 통일은 말짱 황이여』
통일을 준비하며 젊은이들에게 우리 그림을 그려주는 그의 작은 손은 비무장지대 철조망을 하나하나 넘어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약력
1924년 곡성 출생 외가 광한루 후문(남원)
1933년 전국서예전 입선
1958년 전국민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1979년 [한국 무악고] 저술
1980년 하회탈 문화재 오류 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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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14 08:4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