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고 절을 한 미 상원의원
미국 워싱턴 주 5선 상원의원 폴.신 (Paul H. Shin)은 누구인가?
1955년 부산항을 출발하여 미국으로 향하는 갑판위에서 신호범
은 “부모가 나를 버린 나라, 춥고 배고팠던 나라, 멸시받고 천
대 받았던 나라, 나는 이제 너를 버리고 떠난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하면서 침을 뱉었다. “ 1935년 경기도 파주 금촌
에서 태어난 그는 4살 때 어머니가 떠난다. 아버지마저 그를 버
리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떠난 뒤 15살까지 서울역에서 노숙하
고 남대문에서 구걸하며 거지로 생활한다. 당시 한국전쟁에 참
전한 한 미군에 이끌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된 그를 미군장
교둘은 총알처럼 빠르게 부대를 누비며 청소, 다림질, 구두 닦
기 등 수발을 들어 벅샷(bug shot-산탄총알)이라고 부른다. 슬
픔과 비애 속에 어느 날 부대근처 동산에 올라 울음을 터트리고
있을 때 그를 눈 여겨 보던 군의관 레이 폴(Paul) 대위가 다가
와 그를 껴안으며 눈물을 닦아 준다. 그리고 그 분에 의해 16세
때 양아들로 입양되어 도미한다.
미국에 갔지만 수학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초, 중, 고등학교에
서 모두 거절을 당했다. 그는 해당고등학교로 달려가 교장선생님
께 울며 공부를 하고 싶다고 애원한다. 선생님은 이에 감동하여
검정고시를 위한 책 한 권을 주고 그 이후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데, 영어사전을 하나 구입해서 하루에 한 장을 외우고 그 한 장은
갈아먹는다. 지금도 그는 “현재 제 뱃속에는 영어사전이 들어 있
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어를 잘 하나 봅니다.” 라고 말한다. 독학으로 검정
고시에 합격하여 대학에 들어갔지만 실력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
끼고 좌절할 때 입양 아버지는 내가 너에게 해 줄 것이라고는 아
무것도 없다”면서 건네주신 한 권의 성경책을 건네주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끝까지 도와주리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인종 차별 속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학업을 계속한다. 그는
대학교에 발을 디딘 뒤 박사가 되기까지 단 하루도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1958년에 미군에 입대했는데 ‘백인만 출입가
능‘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던 식당에 들어갔다 지배인에게 멱
살을 잡히고 엉덩이를 채인 채 밖으로 내쫓긴 적이 있다. 이때
신호범은 결심한다. 내가 직접 정치를 하여 이러한 차별을 없애
겠노라고 ...
지난 주말,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아천미술관 광장에서 거행된 독립투
사 우석(友石) 유혁(柳赫) 선생의 흉상제막식에는 경향각지에서 오신 인사들
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전주의 이철승 전 국회부의장님의 축사에 이어, 신호
범 미국 워싱턴 주 상원의원이 연단에 오를 때에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저분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신호범 의원은 지난여름 내가 미국에 다녀
와서 쓴 ‘미국정치는 여성천하’라는 여행기에서 소개되었던 분이다. 아시아계
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상원의원이 된 신호범 의원은 한국동포 출신 교수요,
정치가로서 한국의 자랑이요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저 분이 이곳까지 오셨을까?
축사에서 신호범의원은 "나는 나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만 했지 아
버지에게 효심을 발휘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유 의원께서는
이러한 깊은 효심으로 아버지를 기리시니 어찌 고마운 일이 아닌
가? 일제 때에는 소작농을 위한 농민운동과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고 8년간의 옥고를 치르시고, 해방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으로서
건국운동을 하셨다. 그리고 6‧25한국전쟁 때 납북당하여 집안은
폐가가 되고 자녀들은 극심한 고통에 처했던 가문인데 오늘에 이
르러 이처럼 아버지를 위한 기념관과 흉상까지 만들어 기리는 그
효친의 모습을 보니, 나 자신은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하
셨다.
축사를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오더니 맨땅에 무릎을 꿇고 유족인
유 의원에게 큰절을 하는 게 아닌가. 황급히 일어난 유의원은 맞
절을 하였고 그분들이 서로 껴안았을 때 만장의 하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신 의원님 올해 나이 77세, 영암에서 전직 국회의원이신 유의원
은 나의 고교 1년 선배이니 73세 이시다. 나는 오찬 때 신 의원님
께 물었다.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r,분은 웃으시면서 왜
묻느냐고 하셨다. ‘아니, 너무 열정적이네요’ ‘1935년 생 이니까,
우리나이로 77세라고 하셨다.
귀로에 “나는 나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만 했다.’는 그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미국에 입양되어서겠죠?“ 라고 아내가 말
할 때서야 나는 ‘그래, 그랬었구나’하고 그분의 말씀을 유추하였
다.
그렇다면 신호범은 어떻게 미국에서 5선 상원의원(하원의원 1선
포함)까지 될 수 있었는가?
‘브리검영대학'을 간신히 졸업하고 펜실베니아대학 대학원(아
이비 리그)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다시 워싱
톤으로 돌아와 워싱톤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
고 메릴랜드 대학 등에서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4년
워싱톤 주지사의 무역고문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하여 워싱톤주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1996년 워싱턴 주 부지사를 지냈고 1998
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상원의원으로 , 2010년
11월 2일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4선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현재
워싱톤 주 상원 부의장을 맡고 있다. 워싱톤 주는 스타벅스. 마
이크로소프트. 보잉사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가 아시아 소수
계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정치인으로 장수하는 비
결은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 미국은 아버지의 나라”라는 믿
음으로 양국의 가교역할을 수행하여 신뢰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신호범 의원의 고국사랑은 각별하다. 2003년 하와이 주 이민 100주년 기념식
에 참석하려는 그를 만류하던 상원 의장에게 기꺼이 상원 부의장직을 사임하겠다고 사표를 쓴 일은 유명하다. 2007년 워싱톤 주는 한국이민자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1903년 1월 13일을 기념해 미국 50개 주 중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의 날’로 제정 선포했는데 그분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신념과 의지의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2006년 제1회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을 받기도 했다.
워싱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동양역사학)를 받을 때 신 의원의 손
가락에 큼직한 보석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이 반지는 아버지가
박사학위 기념으로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귀고리에 있던 다이
아몬드와 어머니의 반지에 있던 보석으로 만든 것입니다.” 고 말
했다. 양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1987년 세상을 뜨셨지만 그가
힘든 일에 부딪힐 때마다 ‘아들아,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믿는
다. 힘내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고 하였다. 아버지
가 자기를 입양하여 아들로 키우셨던 것처럼 미국인 아내 ‘도
나‘와 함께 한국에서 1남 1녀를 데려다 입양해 키웠다. 그가 대학
교수가 되어 형편이 풀리자 신 의원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형제 5명의 식솔을 모두 시애틀로 불러들여 봉양
했으며 그러던 중 아버지가 타계하였던 것이다.
양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 이에 부응하고자 고난을 극복하
고 운명을 개척하려 노력해온 신 의원은 지금 자신이 받은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되갚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버린 야속한 나라를
다시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마음먹고 모국을 떠났던 것이 죄스
러워 20년 뒤 박사학위를 받고서 다시 모국을 방문할 때 “사과드
리러 왔습니다. 뿌리가 그리웠어요. 이 나라가 제게 잘못한 건 아
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 와서 남대문 옆 하얏트 호
텔에 투숙하여 아래를 내려다 보았을 때 그분의 감회가 어떠했겠
는가?
그가 떠날 때 남대문 일대는 온통 허허 벌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고 있는 선거구는 28만의 인구 중 97%가 백인이지만 그
의 정직과 성실, 겸손과 중후한 인품으로 선거구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동양인의 선량이라니 어찌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
가? 그 지역의 한 신문에 난 그에 관한 제목은 이렇다.
“한국에서 이민을 온 자 - 발가락에서 피가 나지만 그래도 걷
는다.”
그는 돈은 없지만 나에게는 멀쩡한 다리가 있다면서 14,000가구
의 대문을 두드리고 일일이 절을 하며 걸어 다녔다고 했다.
신호범 상원의원은 가는 곳마다 말한다.
“나는 전쟁고아 출신이고 나는 입양아였다. 계획이 있으면 지
금 당장 시작해라. 내일은 늦다."
“No Cross No Crown! (고난 없이 면류관이 없다.)”
”Can Do It. (나는 할 수 있다.)"
신호범 의원은 ‘기적을 이룬 꿈’이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젊은이들은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꿈만 가지고서는 안 된
다. 꿈을 가지고 난 뒤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무엇에 의지해라. 나의
경우는 그것이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양아버지 폴(Paul) 대위 내외의 국경을 초월
한 인간애에 감사드리고 싶다. 신호범 의원은 참으로 우리의 젊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분이다. 무릎을 꿇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에
게 절을 하는 그분의 겸손한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에 선하다. 내
가 그분을 만난 것은 하늘이 주신 축복이었다.
미국워싱턴주
5선상원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