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서 잠든 비운의 유혁(柳赫)
장손자 유수택의 편지 그리고 아들 유인학의 증언
광주광역시 부시장을 지낸 유혁 지사의 장손자 유수택. 그러니까 유인학 의원 큰형님의 아들이다. 다음은 그가 할아버지 영전에 올린 편지다.
할아버님!
1966년 3월 16일 평양방송을 청취한 영암경찰서 정보과 대공계 형사가 어머님을 찾아 왔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날로 제사를 모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4일에 할아버님을 비롯해 아버님과 제 아들 춘택의 제사까지 합동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할아버님,
할아버지는 8‧15광복 후에 한두 차례 집에 들르시고 6‧25전쟁 전후에는 전혀 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조국의 앞날, 우리 민족이 스스로 함께 잘 살 수 있는 민족공영의 길을 모색하시느라 집에도 못 오시고 동분서주하셨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전에 우리 집안은 아버지 주도하에 양조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인하 숙부는 광주서중과 고창고보를 졸업하셨는데 하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 승낙을 받으시려는 듯 대화를 나누시고 집을 떠나셨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으셨습니다. 아마도 김일성대학에 입학하시겠다는 말씀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셋째 인봉 숙부는 목포 문태고등학교에 재학 중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채 사상범으로 연루되어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6‧25가 발발하여 그 와중에 세상을 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6‧25가 발발하여 우리 집안은 여기저기 피난생활을 하다가 수복이 되어 집에 돌아와 보니 양조장은 불타버렸습니다. 그때 넷째 인학 숙부가 초등학교 5학년, 막내 건이 숙부와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1951년 음력 1월 말일 아버님은 집을 나가신 후 그해 3월에 돌아가셨고, 저희들은 광주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인학 숙부는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미주리대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양대학교 교수로 계셨습니다. 13대, 14대 국회의원에 당선 되셨고, 한국조폐공사 사장을 역임한 후 세계거석문화협회 총재를 맡아 고창의 고인돌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며느리가 된 숙모(유인학의 처) 유종인(劉鍾仁)은 국회의원을 지낸 강진 유수현 씨의 여동생으로 한양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내고 정년퇴직하셨습니다. 다섯째인 건이 숙부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대한교육보험 상무이사와 교보문고 사장 그리고 교보실업사장을 거쳐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냈습니다. 장손인 저 수택은 동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고창군수와 완주군수 그리고 정읍, 여천, 순천시장을 지냈으며 내무부와 행정자치부, 국무총리실의 중요 직책들을 두루 거쳤습니다. 광주광역시 행정부시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하고 전남개발공사 사장과 (주)고리 사장을 지냈습니다. 저의 둘째아들(할아버지 둘째손자) 춘택은 조선대학교 광산과를 졸업하고 대한승마협회 전무이사로 재직 중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준비 차 미국을 다녀오던 중 KAL 007 뉴욕 발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소련의 비인도적 만행으로 격추되어 순직했습니다.
할아버님, 저희 두 분의 숙부님과 저희 4남매는 아버님이 안 계시고 할아버지께서 북쪽에 계실 때에도 늘 할아버님을 생각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높은 정신을 받들고 훌륭한 가문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할아버님!
제가 어느 날 집에 왔을 적에 어머니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물려주신 유품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유품은 고조부님의 통정대부칙명과 증조부님께서 후학을 가르칠 때의 서적, 그리고 할아버지의 옥중서신 등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 가문의 가보였습니다. 그 가보를 접하는 순간, 이 물건들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1997년 어느 날,
다정한 친구의 소개로 북에서 내려온 박병엽 씨를 만났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1950년 전후의 할아버지의 활동, 그리고 북으로 가신 후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 북에 가셔서 4년여를 홀로 생활하셨다는 내용, 그 후 따님이 하나 있는 전쟁미망인을 할머니로 모셔 들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고혈압으로 고생하시어 금강산 온천과 주을 온천에서 휴양하시고 1996년 1월 2일 평북 선천요양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나 뵈옵고 그해 3월에 돌아가셨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할머님 사이에 태어난 자손은 없다고 했으며, 그 후 할머니는 함경도로 시집간 딸의 집으로 가셨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2005년 중국에 있는 친척에게 평안남도 평성시 하고면에 있다는 할아버지의 묘를 확인하도록 부탁했더니 누구를 시켜 현장을 다녀오도록 했답니다. 감시가 심하여 사진 촬영은 안 되고 눈으로 목격한 바, 할아버지 묘소의 관리상태가 허술하다는 것입니다. 그 뒤 또 한 차례 사람을 시켜 북한을 다녀오도록 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아마 돈만 떼인 것 같습니다. 2002년 9월 12-28일까지 인학 숙부가 세계거석문화 총재로서 북한 고인돌 연구차 북한을 다녀왔습니다. 북한의 고위 인사에게 할아버지의 북한에서의 행적과 묘소의 위치 등을 확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구체적인 대답은 없었답니다. 2003년 1월 6-10일 건이 숙부께서도 한국관광공사 사장 재직 중 평양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에 참석차 평양에 가서 이곳저곳 탐문해 보았으나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인지 더 이상 할아버지에 대한 상황을 알기 어려웠답니다.
1984년 춘택이가 KAL기 사고로 세상을 뜨자 집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우리 집안이 남들에게 인심을 잃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여 이듬해인 1985년 선대들의 선영을 다시 손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산소는 분수동 선영에서 가장 좋다는 길지로 ‘매화낙지혈’의 명당인데 묘소를 마련하던 날 지관인 현원 이규상 선생이, 5년 안에 발복하니 장관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하게 5년 째 되던 해 인학 숙부께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셨고 그해 저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여천시장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저희들은 어린 나이에 많은 시련과 고통 그리고 불행한 일도 겪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항상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가문을 떠올리면서 올곧게 살아 왔습니다. 저희들이 사회에 발을 디딘 후에는 대한교육보험을 설립하신 고 신용호 회장님과 그분의 동서이신 고 조상호 장관께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저를 공직생활에 발을 딛게 해 주신 전북지사와 문화방송사장을 지내셨던 이환의 씨, 내무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손수익 전 장관님, 그리고 공직생활 내내 정을 쏟아주신 서정화, 전석홍 전 장관님의 은혜를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
누구보다도 낭산 김준연(郞山金俊淵) 선생을 잘 아시죠? 같은 고향이면서 독립운동을 함께 하셨고 공산당과 사회주의 이념도 같이 하셨던 친구가 아니십니까? 1960년 건이 숙부께서 서울 법대 재학시절에 재경 영암향우회가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열렸는데 그때 4대 국회의원이신 낭산이 격려차 참석하셨답니다. 숙부께서 낭산을 뵙고 “선생님, 유혁 씨가 제 아버님이십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아니 너희들이 안 죽고 살아 있느냐? 그럼 어머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으시더랍니다. 인학 숙부께서는 지금 ’낭산기념사업회‘를 만드시고 생가복원사업과 추모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오늘 할아버지의 동상을 제막하는 날,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하였으나 언젠가는 할아버지의 깊은 뜻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밝혀지는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할아버지를 고향동산에 모시고 성묘 드릴 그날까지 북녘에서 편히 쉬십시오.
2011. 10.29 -장손 수택 올림
유혁의 아들 유인학의원의 증언
11월 18일, 남원에서 있었던 지리산세계복합문화유산등재를 위한 국제 학술 세미나 때문에 유인학의원이 남원에 내려왔다. 그분은 유혁의 넷째 아들로 영암에서 선 국회의원을 두 번 하셨고 조폐공사 사장을 지내셨을 뿐만 아니라 고창의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장본인이다. 그리고 지리산세계유산등재 준비 위원회대표를 맡고 계신다. 필자역시 준비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세미나가 있었던 당일 새벽부터, 남원부시장과 시장을 만나 이 문제의 방향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썼던 유혁선생의 평전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유총재는 무엇보다도 아버님에 대한 객관적이고 애정 어린 평론에 감사하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내가 유족으로부터 이야기를 직접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분을 만난 것이 한 두 차례가 아니었지만 그분은 나에게 한번 도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 우리집안은 일제 때는 항일운동을, 해방 후는 사회주의와 반탁운동을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몽양 여운형 계에 속했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반 박헌영. 반탁운동으로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조선조에서는 전통적인 소론집안으로 옳은 소리 하다가 한때는 폐족이 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제가 4.19, 민통, 6.29 등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졌던 것도 증조부님 이래 애국 애족, 특히 독립되고 자랑스러운 한민족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일본. 중국은 물론 미국. 러시아에 꿀리지 않는 한민족 공동체 수립이 꿈입니다. 주교님이 ‘사회주의자 유혁’의 평전에서도 언급 하셨지만 영암출신의 낭산과 아버님은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의 동지이셨고 절친한 친구이셨습니다. 그분이 ML공산당 당수 때 8년간 감옥에 가셨는데 그 뒤 전향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으로서 법무부 장관과 6선 국회의원을 지내시고 대통령에도 출마하셨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제가 1992년부터 ‘낭산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 일대기’를 1996년에 발간하였고 지금 40여억 원을 투입하여 기념사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영암에서는 대표적 독립투사로 낭산과 제 아버님이 꼽히고 있지요. 저와 수택이는 주교님이 우리 이야기 한마디 들은 적도 없이, 제막식에 참여하시고 난 뒤 스스로 제 아버님의 평전을 쓰신 것에 대하여 놀랍고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을 끝내면서 눈가에 흘리는 눈물을 닦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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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히도 유혁 지사의 제사날인 음력 2월 24일은 필자의 생일이다. 그러고 보니 나와 유의원의 집안과는 매우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 사우스 타코타의 큰 바위에 새겨진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 조각상 건너편에 있는, 인디안의 영웅 ‘클레이지 호스’를 조각한 ‘코작‘의 생일이 ’클레이지 호스‘가 죽은 날인 9월 4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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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23 18:5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