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소리가 제대로 녹아든 춘향제'를 안숙선 명창에게 요구한다.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제82회 춘항제 제전위원회 공동위원장인 안숙선 명창에게 기대하는 바를 축약한 단어다.글로컬라이제이션은 토착문화를 반영한 세계화를 뜻하며 세계화를 뜻하는 글로벌라이제시션과 현지화를 뜻하는 로컬라이제이션의 합성어다. 주로 다국적 기업들의 글로벌 전략으로 애용되지만 우리 기업이나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바람직한 방식으로도 즐겨 쓰인다. 이 말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한류나 비빔밥, 불고기, 김치 등이 성공사례로 꼽힌다. 문학적으로는 최근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가 좋은 예다. 전통적인 한국 어머니상을 통해 세계인의 감동을 이끌어냈고 끝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최근 춘향제의 모습을 보자. 춘향제의 베이스는 판소리 등 국악이지만 사실상 실종됐다. 대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유행가가 길거리를 뒤덮었다. 손님을 끌기 위해 틀어놓는 유행가는 스피커가 터지도록 울려퍼지며 춘향제를 그저그런 지역축제 야시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같은 유행가를 춘향제 기간에 수백 번도 더 듣기도 해 머릿속에 맴돌기도 한다. 춘향제라는 것은 하늘에 올라 있는 에드벌륜만이 알려줄 뿐이다. ‘원조! 소리의 고장’인 남원에서 그것도 춘향제 기간에 ‘우리 소리’를 맛보려면 국악 공연이 있는 극장으로 가야 한다. 춘향제가 세계화는커녕 국내에서도 고전하는 이유다.
축제의 얼굴인 춘향이 선발대회도 여전히 미스코리아의 아류로 인식된다. 전통적인 미인상을 뽑는 대회가 아니라 수영복 심사만 빠진 흔하디흔한 미인 선발대회 중 하나다. 후보들도 미인대회 입상 경력만을 원할 뿐 전통미인과 우리 소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상당수다. 적어도 춘향이 선발대회 우승자라면 판소리 춘향가 정도는 꿰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대적 미적 기준에 다소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소리를 가까이 해온 후보가 춘향이로 선발돼야 제대로 된 선발대회가 아닐까 싶다.
먼 과거지만 춘향이 세계무대를 누빈 일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춘향전이 국내를 넘어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경쟁력 있는 소재라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안무가 미하일 포킨(1880~1942)은 춘향전을 소재로 만든 발레 ‘사랑의 시련’을 통해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36년 모나코 몬테카를로 오페라극장에서 러시아발레단을 이끌고 초연했으며 1956년부터 1968년까지 프랑스 파리, 영국 애든버러 등에서 공연돼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앨리샤 마르코바, 베라 네므치노바, 나탈리 크라솝스카 등 전설적 발레리나가 춘향역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숙선 위원장의 역할은 명료하다. 포킨처럼 춘향제에서 한국적인 것을 뽑아내는 일이다. 국악계에서 그동안 쌓아온 내공을 이번 축제에 쏟아내야 한다. 한국적인 것에 부합하는 것이 뭔지 가려내고 쓸데없는 것들은 과감하게 도려내야 한다.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한국적인 것을 축제 참가자들에게 맛보게 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순수 국악인인 안 위원장에게 단순히 행사기획자의 자질을 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춘향제를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돌려놓는 일, 안 위원장의 소명이다.
또한 제전위원회에 속한 각계각층의 인사들도 안 위원장을 중심으로 가장 한국적인 축제를 만드는데 거들어야 할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벌써부터 이권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지만, 춘향제에서 한국적인 소리가 배어날 때까지는 이를 잠시 거두는 것이 좋겠다.
이 태 술
그룹 05 > 사설·칼럼 8 페이지
12-03-29 08:1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