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스러운 각설이 - 시민신문 논설고문 서호련
이번 춘향제 때 수필반 문우들이 남원을 방문하였다. 때마침 대동길놀이가 진행 중이어서 길이 통제되었고 문우들은 다리 위 한쪽에 차를 받쳐놓고 거리를 행진하는 길놀이를 한참동안 구경했다. 어사또 행차와 신관 사또 부임행차, 그리고 흥겨운 취타대의 나팔소리도 자못 흥미진진했다. 우리는 그냥 구경은 했지만, 2시간 여 진행된 각종 퍼레이드를 준비하기 위하여 해당 시민들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가? 축제장의 범위도 넓어 무엇 부터 구경을 해야 할지 우리는 절절맸다.설치해 놓은 각종 부스를
기웃거리면서 번데기도 한 컵 사고, 군밤도 한 종기 사서 군것질을 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녔다. 그래도 남원이 추어탕 고장이라고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추어탕과 미꾸라지 튀김 그리고 파전에 동동주까지 한 잔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론은 각설이 타령이나 듣게 나가자고 하였다. 축제장의 꽃은 단연 각설이놀이판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도 각설이공연장이었다.
한 각설이의 엿장수 이야기는 수긍할 만하였다. 엿판에는 엿 장시가 있고, 다음엔 엿장수가 있으며, 그 위에 엿 장사가 있단다. 엿 장시는 그냥 엿 장시고, 그보다 조금 수준이 높은 것이 엿장수며 자기처럼 사(士)자가 붙은, 변호사나 회계사나 의사나 약사같이 전문직으로서의 엿 장사(士)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각설이 판에는 텐트 안에 의자가 쭉 놓여 있는데, 앞줄의 의자는 비어 있고 뒤에는 꽉 찬다. 우리는 용감하게 제일 앞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각설이도 좋아하였다. 각설이의 노래 솜씨는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일류가수 못지않았다. 그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르지만 목도 안 쉰 것 같다. 자기들 노래를 담은 CD도 팔았다. 이것을 사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관중들은 각설이의 노래가 대충 끝날 때쯤이면 엿을 안 사려고 자리를 뜬다. 때문에 각설이들은 좌석을 안 뜨도록 별의 별 재주를 다 부린다.
어차피 공연 하나 보려고 해도 돈 만 원은 가져야 하는데 여기에서 엿이나 좀 사주고 마음 놓고 관람하면서 스트레스나 푸는 것도 훨씬 실속이 있다. 조그만 플라스틱 박스 하나에 2,000원씩을 받는데 엿이라야 서너 개 들어 있다. 각설이 말대로 그냥 동냥하는 셈치고 사주는 것이다.
이번 각설이 판에서는 가슴에 와 닿는 철학적인 말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각설이는 작년에 정읍 내장사에서 있었던 각설이 대회에서 금상을 탔다면서 자기가 대한민국의 최고 각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상장까지 보여 주었다. 꼬꾸라지면서 엎어지면서 구슬프게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어머니 노래를 불렀다. 좌석 여기저기서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만 원짜리, 5천 원짜리를 들고 나와서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각설이에게 주었다. 각설이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옆구리에 차고 있는 깡통에다 연신 돈을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그 구슬픈 노래 가락이 끝나자 갑자기 템포가 바뀌면서 천지를 진동하는 북과 꽹과리, 징소리를 울렸다. 그리고는 각설이가 갑자기 옷을 벗더니 팬티에 브래지어만 찬 맨몸의 여인으로 변했다. 우리는 배꼽을 쥐고 웃었다. 엿을 팔러 다니는 여장남자 같은 사람도 희한한 몸짓을 하면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데 자못 섹시하기까지 했다.
다음에 각설이의 철학이 나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앞에 앉아 있는 어떤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절대로 아이들더러 공부하라고 하지마세요. 그 대신 ’너희들, 어제 그 각설이 보았지? 공부 안하면 니들도 그 각설이처럼 깡통 차고 노래 부르는 거지가 된다.' 이렇게 말하면 애들이 놀지 않고 공부 잘하게 될 것이오."하였다. 다음에도 가슴에
와 닿는 철학적인 말이 있었다. 자기는 지금 57세인데 자기의 꿈이 가수가 되는 것이라 했다. 사실 자기가 노래는 잘하는 편인데, 노래만 잘 한다고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송국사람들한테 뇌물도 주어야 TV에도 나오는 것이지 그냥 맨입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60세까지 가수가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거지놀이를 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라고 해서 사(士)자가 안 되고 싶겠는가?
팔자가 기구해서 이 각설이 판에 들어 왔지만 이것도 어엿한 직업이니까 나는 은퇴할 때까지 내 직업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진지하게 말 하는 것이었다. 존경할 만한 직업관이었다. 그날따라 그 각설이가 무척이나 존경스러웠다.
그룹 05 > 사설·칼럼 1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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